페북에 올라온 질문 중에 카테고리 이론(Category Theory)이 어떤 이유에서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겠다는 질문이 올라왔다. 이 이론은 20세기 중반에 Homology 이론이 만들어지고 나서 우리가 수학에서 이론을 만든다는 것에 Homology 이론이 그 전범이 된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한 가지 대상을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가 잘 아는 다른 대상과 사이에 구조적인 동일형태관계를 맺고 그 두 번째 대상을 통하여 문제의 대상을 이해한다는 도식을 (메타)수학 이론으로 정리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0세기 전반부에는 수학을 이해하는 도구로는 집합론을 꼽을 수 있다. 이것은 수학의 이론이란 것은 모두 어떤 대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대상의 모임을 집합이라 부르고 각각의 대상은 이 집합의 원소로 보는 방법이다. 그러나 이런 대상을 이해하려면 집합만으로는 부족하며 이와 유사한 집합 사이의 관계를 파악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곧바로 파악하여 두 집합 사이의 관계(relation) 특히 함수(function)을 써서 이해한다는 집합론을 만들었다.


그런데 호몰로지 이론이 나오기 이전까지 위상공간은 위상공간 사이의 문제만 생각했고 따라서 연속함수나 homeomorphism을 공부한 반면, 대수학에서는 군, 환, 체 등을 생각했고 그들 사이의 homomorphism이나 isomorphism만을 생각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로이 호몰로지 이론이 개발되면서 위상공간마다 군이나 모듈(가군)을 대응시키고 continuous map마다 homomorphism을 대응시키는 생각을 하니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엄청난 것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런 대응도 함수임에는 틀림 없지만 우리가 생각할 때는 위상공간 전체의 모임에서 군 전체의 모임으로 한꺼번에 대응시키므로 뭔가 새로운 말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사실 이런 대상 전체의 모임이 집합이 되기에는 너무 크다는 것도 다른 용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그래서 이런 어떤 구조를 갖는 대상 전체의 모임 (위상공간의 모임, 군의 모임, 등등)을 category라고 부르고, 두 category 사이에 대응을 functor라고 부르기로 하였다. 그런데 homology 이론을 잘 들여다 보면 이 대응관계(functor)만 알면 이 이론의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우리는 category의 여러 성질을 알아내는데 그 성질은 functor가 다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집합론으로 돌아가 보아도 마찬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집합의 성질에 대하여 알고 싶은데 이 집합의 원소는 전혀 보지 않고 이 집합에서 나오고 들어가는 함수들 전체의 합성관계만 다 알면 이 집합의 집합으로서의 성질을 다 알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집합과 원소의 성질을 결정하는 것은 원소 자신이 아니라 함수라는 새로운 사실이 중요한 사실로 대두되었다.


그래서 구체적인 category (위상공간의 category, 군의 category,...)에 대한 이야기 말고, 일반적인 category의 이론을 만들려면 (집합론처럼 무정의 술어를 써서 공리적으로 만들듯이) 이 개념의 핵심을 잡아야 하는데 결국 핵심은 우리가 대상(object)이라 잡는 category의 원소들은 중요하지 않고 이들 사이의 함수에 해당하는 사상(morphism)의 합성관계만이 필요하니까 object는 집합이라던가 하는 가정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즉 object 자체는 원소를 가진다거나 하는 가정 없이 무정의 술어이고 morphism도 더이상 함수라던가 할 필요가 없지만 합성이라는 것은 할 수 있어서 이들이 어떤 식으로 합성되는지 그 작용소만 정의되었다고 해도, homology 이론에서 하던 것과 같은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이 morphism에서부터 object에 어떤 원소가 있는지도 어느 정도 알아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category 이론은 집합론의 meta 이론이고, 어떤 의미에서 집합론이 집합을 주 대상으로 하고 이로부터 함수가 파생되어 나온 구조를 가지고 있다면, category이론은 함수(morphism)이 주 대상이고 이로부터 object의 성질이 파생되어 나오는 것을 연구하는 소위 집합론에 dual한 형태의 이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기에는 이런 새로운 방법론이 집합론이 다루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따라서 매우 효율적인 언어임에는 틀림 없지만 집합론을 하는 것보다 더 알려주는 것은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언어는 현대 수학의 모든 부분에서 집합만을 다루는 것보다 훨씬 편리하고 직관적이어서 현대수학의 언어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런데 이후 수십년이 지나면서 여러 다른 곳에서 이 개념을 가져다 쓰게 되었다. 우선 컴퓨터에서 네트워크를 연결할 때 그 연결 네트워크의 구조를 그쪽 이론에서 보통 topology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컴퓨터의 내부와는 무관하므로 컴퓨터를 한 점이라고 보아 object라고 부르고 네트워크가 연결되면 morphism이 하나 있다는 식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여 category 이론의 정리들을 거기 적용하였다. 한편 훨씬 더 시간이 지나 최근에는 논리학에서 어떤 논리학을 category와 morphism으로 설명하고 이를 바탕으로 확장된 논리학을 만들어나가는 등의 이론이 새로 생겨 양자논리(?) 라는 등의 새로운 시도가 되고 있다. 이 이론은 sheaf(층)의 이론과 맞물려 논리학 자체가 또 다른 방향으로 매우 추상적인 수학으로 변모해 나가는 것을 보여준다.


역시 수학의 발전은 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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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중등교육에서는 수능 절대평가가 관심사인가보다. 영어 과목은 2018학년도 수능부터 절대평가를 한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어, 수학도 절대평가를 원하는 사람도 많다. 이 말의 뜻은 수능이 고교 과정을 일정 수준으로 이수했는가에 대한 자격시험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마치 단순히 평가 방식을 바꾼다는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원래 시험을 없애고 새로운 시험을 만드는 수준의 개정이다.


문제는 이것만으로는, 그래서 고등학생의 30-50%가 모두 최상위 등급을 받아 통과했다고 하면 대학이 학생을 어떻게 선발하는가 하는 문제가 된다. 뭔가 생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 새로운 것에 사교육이 끼어드는 것이 줄어들기를 바라는 것이겠지...


두 가지 가능성이 보인다. 첫째는 대학이 본고사에 해당하는 것은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막기 힘들 것이다. 결국 또 다른 사교육이 생긴다. (이 배경에는 어떤 경우에도 사교육이 효율적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둘째는 강력하게 대학이 본고사를 치를 수 없게 막는 것이다. 이 경우 이 문제는 대학 입학 후의 문제가 된다. 실제로 이렇게 운영되는 것이 미국의 교육이다. 고등학교에서는 어느 수준의 공부만 한다. 대학은 이 학생들이 어떤 과목을 이수했는가 성적이 어떤가만 보고 학생을 선발한다. 그리고 2년 동안 기초교육을 시킨다. (이 기초교육에는 보통 언어, 수학이 있고 이과쪽을 전공하고자 하는 경우는 과학 한 과목 series 정도가 포함된다.) 이 과정에서 고등학교에서 얼마나 공부를 했는지가 드러난다. 그래서 이 초기 2년 사이에 많은 학생들이 학교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성적이 별로 안 좋으면 자기에게 맞는 대학으로 전학한다. 내가 공부했던 UCLA에서 내가 공부하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만 보면 500명이 훨씬 넘는 (아마 7-800명 정도) 학생이 1학년에 입학하지만 이 2년 사이에 대부분 더 낮은 학교로 전학가고 3학년이 되면 200명 정도가 남는다고 들었다. 이 중에는 다른 학교에서 학점이 좋은 학생이 전학온 경우도 있으니까 사실 대부분이 학교를 옮긴다. (일반 미국 학생들도 사정은 비슷하다.) 대학에 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이 가능하다면 당연히 이 둘째 방법이 좋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을 가르쳐보고 평가하면 정말 제대로된 평가를 할 수 있다. 


(예전에 우리가 쓰던 방법이 유럽 방식으로 고등학교에서 엄청나게 공부하고 시험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던 것이라면, 지금은 점점 고등학교는 최소한만 가르치고 공부하고 싶어하는 또는 집에서 밀어붙이는 학생만 공부해서 대학 간 다음에 공부가 판가름나는 미국 식으로 바뀌는 것이다. 물론 미국식은 성공적인 교육이 아니라고 평가되고 있는 것이지만...)


미국은 이 방법을 잘 쓴다. 대학에서도 그렇지만 대학원에서도 초기 core 과목은 성적 받기 매우 힘들고 이것을 통과해야 제대로 입학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까 학부에서는 2년 4학기 (또는 5-6학기) 길이의 Calculus와 1년 2학기 물리학이 이 역할을 한다. 한편 전공에 들어가면 다시 이런 과목이 있다. 수학 전공이면 해석학(Advanced Calculus)가 그것이고, 전산학 전공 같으면 전공에 들어와서 처음 듣는 컴퓨터 언어 과목이 이런 역할을 한다. 많은 학생들이 이 과목을 패스하느라 이 과목을 두 번, 세 번 듣는다. 그리고도 안 되면 자신의 수준에 맞는 학과나 대학으로 전과/전학을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학과 사이의 전과나 타 대학으로 전학이 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때는 시험을 보기 힘드니까 교수의 추천서가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이 두 번째 경우에는 사교육이 어떻게 될까? 이 경우에 사교육이 없어질 리는 없다. 하지만 이 사교육은 대학 과목별로 다르고 전공별로 다르고 어떤 식으로 이루어질 지도 모르니까 아마 구체적으로 분별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사교육이 많다고 말하기도 어려워질 것이고 사교육을 없앴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진짜로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내 관점에서 보면 이렇게 생기는 사교육은 지금의 사교육보다는 낫다. 적어도 쉬운 시험에 대해 실수 없도록 준비시키는 비교육적인 사교육보다는 훨씬 더 필요한 내용에 대한 실력을 늘려 주는 사교육이 될테니까 학생의 입장에서도 이런데 비용을 들인다면 쓸데 없이 돈을 쓰는 것이 아니다. 정말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사교육에 좀 더 가까울 것이다.


정책을 입안하는 분들이 이런 결과를 원해서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뭐 뒷걸음 치다가 뭐 잡는다"는 말처럼 어쩌면 이런 일이 일어나면 교육이 발전할지도 모른다. 단지 대학생들이 자유로 전학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겨야 할 것이다. 또 결원이 생겼을 때 대학이 즉시 정원을 추가로 채울 수 있어야 학교가 운영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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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에 김모군이 수학을 이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는 글을 올렸다. 세 가지 경우를 제시하고 이 중 어느 정도이면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그 세 가지는 첫 줄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1. 연역적 논리 전개 과정을 따라갈 수 있으면 이해한 것이다.
  2. 전체적인 증명 과정이 머리속에 자연스럽게 그려져야한다.
  3. 직관적으로 그 명제가 참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세 가지에 대해서 긴 설명을 덧붙였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그리고 이 세 가지보다 더 많은 단계를 경험해 보았지만... 여기서는 이해한다는 것에 대해 내가 느끼는 점을 적어본다.


수학을 공부하면서 항상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공부한 내용을 이해하겠다는 것이고, 학생시절에 나도 위의 세 가지 등을 가지고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처음에는 증명을 따라가면 이해되었다고 생각한 적도 있고, 이 증명을 보지 않고 적을 수 있을 때, 증명이 환하게 떠오를 때, 원래 증명을 한 번도 안 본 상태 또는 잊어버린 상태에서 새로 만들어낼 수 있을 때, 그 정리가 적용되는 예를 통한 이해, 그 정리의 조건들이 만족되지 않을 때 각각의 반례 등등 여러 단계를 이해라고 생각했었다.


잠시 사이드로 빠져서 수학의 증명 방법에는 소위 루틴한 증명과 그렇지 않은 특이한 방법이 있다. 루틴한 방법이란 기본적인 수학 전개법을 알면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증명 방법이다. 이것은 증명이 복잡하거나 길다는 것과는 상관 없다. 경우를 나눈다면 두 경우로 나누든 20 경우로 나누든 걸리는 시간에만 차이가 있을 뿐 각 스텝은 생각해내기도 그리 어렵지 않고 실제로 증명을 써나가는 것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특별한 아이디어를 필요로 하는 것은 그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으면 그 증명을 하기 어려운 경우를 말한다. 대표적인 쉬운 예로 칸토르의 대각선 논법은 짤막한 증명임에도, 그 증명하려는 대상 명제의 용어들의 정의를 들어다보는 것으로는 그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런 방법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극소수 뿐이라는 것이 루틴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증명을 외우는 방법은 위의 분류에 따라 루틴하지 못한 것을 구별하여 내서 이런 것은 그냥 아이디어를 외운다. 한편 루틴한 것은 빨리 생각나게 하려면 증명의 과정에서 중요한 turning point를 기억해둘 필요는 있지만 기억하지 않았어도 시간만 많이 있으면 결국은 증명해낼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제 이런 과정을 거치면 증명들을 환하게 기억하는 수준을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수학을 잘 하는 사람과 이야기해 보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 느껴진다. 어딘가에도 썼지만 내가 박사과정에서 지도교수님과 이야기할 때 느꼈던 것을 이야기하면... 대학원에서 기하학을 공부하면 잘 이해되지 않아서 왜그런가를 질문하면 많은 경우 선생님은 "설명은 거의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간단한 건데..." 하는 식이다. 그 한마디가 사실이라는 것은 잘 알고 또 믿지만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던가 그럴 것 같지만 확실히는 어째서인지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따져 들어가면 금방 "학부 해석학에서 이런 정리가 그거쟈나" 하는 말씀을 한다. 알았다고 하고 돌아와서 그 정리를 찾아서 음미해보면 아 이 정리가 그런 식으로 쓰이는 것이었구나 하고 새롭게 보인다. 그 정리는 증명도 환하게 알고 있고 예도, 또 반례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는 알지 못했다.


이해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면 어떤 내용도 이해가 완벽하게 되었다는 상태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예전에 만들어진 수학을 생각해 보면 당시의 수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고 생각되지만, 그 이후에 만들어진 새로운 개념들 위에 그것이 적용되는 새로운 상황을 보고 나면 예전에 이것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보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상황을 보고 나면, 말은 변하지 않았고 정의도 똑같지만, 예전의 단순한 상황에만 적용되던 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면서 이 적용 상황이 복잡해진 만큼 개념도 복잡해졌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 정의는 변하지 않았으니까 수학적으로는 개념의 변화가 없다고 하는 것이 옳을지 모르므로 말을 바꾸어서 이 수학 개념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된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을 몇 자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한 적이 있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설명했지만 결론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안다(이해한다)는 것은 그 대상(개념)을 그냥 들여다보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1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1을 알 수 없다.) 오히려 이것을 어떻게 쓰는지를 알아야 이해가 된다. (1+1=2가 이에 대한 이해를 증진시켜준다.) 이런 상태를 간단히 대상과 그 위에 작용하는 operator 사이의 관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operator는 그의 작용대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는 방법이다. 이 operator는 일반적으로 function(함수)라고 지칭된다. 그리고 함수는 대상에 작용하는 것으로 일종의 dual object이다.


비슷한 맥락이지만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면 그와 비슷한 다른 대상(예를 들면 1에 대해서 2 같은 것)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지(즉 1+1=2, 2+1=3,...)를 알게 됨으로써 1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동시에 +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object와 dual object(function)에 대한 이해는 동시에 깊어진다.) 이 function은 수학의 경우에는 함수이지만 일반적인 이해는 이보다 좀 복잡해서 관계(relation)라고 생각하면 좋다. 즉 어떤 대상을 이해하려면 이 대상과 주변 대상 사이의 관계를 파악해야 하고, 이 관계가 늘어날수록 이해가 깊어진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해가 끝났다는 그런 상태는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던 증명을 외운다, 예와 반례를 안다, ... 등등의 방법도 당연히 이런 관계를 파악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관계를 빨리 얻어들으면 수학의 이해가 깊어진다. 그리고 이것은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얻어듣는 것이 된다. 단지 초등학생이 대학교 강의에 가면 무슨 말인지 모르니까 그런 식으로는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배우는 것은 보통 이야기하는 선행학습은 더욱 아니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은 이런 것을 해 줄 수 없다.(능력이 없다) 그래서 대학원 세미나 강의는 갓 박사를 마친 사람이 제일 잘 하지만 초등학생들 상대의 강의는 어쩌면 은퇴한 老 수학자가 가장 잘 할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이것은 내 말임)


일반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맥락 중의 한 가지는 아름다움에 대한 것이었다. 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은 수학은 이해하는 것과 매우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고 생각된다. 사실 위의 과정은 수학의 이해와 꼭 마찬가지로 아름다움을 느끼는데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보인다. 어떤 이론을 이해하면 즐거운 것이 당연하다. 수학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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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북에 이모군이 「수학의 정석이 싫어」라는 요지의 글과 사진을 올렸다. 하는 말의 내용은 어떤 부분은 이해가 되고 몰라도 아마 이런 뜻이겠거니 짐작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수학의 정석을 요즈음의 책들과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좀 있다.


예전에 내가 고등학교 공부할 때도 수학의 정석은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참고서였고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던 시절까지도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요즈음은 잘 모르겠다. 이제는 관심이 별로 없어서 상황이 어떤지 파악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학생들도 정석이 싫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정석의 위치가 아직 비교적 건재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생각된다.


수학의 정석은 꽤 옛날에, 내가 정석을 사야 하던 시절보다 훨씬 더 먼저 만들어졌다. 내 기억으로 내가 초등학교 들어가던 시절(1960년대 초)에는 정석이 없었던 듯하다.(우리 집에는 수학책이 다 있었으니까. 내 기억에 없다.) 다른 분의 정석보다 조금 간결한 참고서는 기억난다. 저자 성명은 기억 안나는데 김모라는 분이었던지? 어쨌든 그것도 일본 참고서를 참고하고 쓰신 것인지 간결한 설명이 좋았던 것으로 기억되지만...


하지만 내가 고등학교 가기도 전에 정석이 나왔고, 저자는 홍성대 선배님으로 되어 있지만 들은 풍문으로는 홍선배님의 여러 후배들이 힘을 합쳐서 참고서를 저술하였다고 한다. 정확한 내용은 잘 모르지만 적어도 몇 분이 같이 작업하셨다고 하고 그 중 한 교수님은 이미 몇 년 전에 타계하셨다. 내용을 보면 당시 구할 수 있었던 일본 수학 참고서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총 망라하고 있어서 내용은 많고 정리는 조금 잘 안 되어 있다고 할 그런 책이다.(우리 집에는 당시 중요한 일본 참고서가 여러 개 있었다.)


요즈음은 내가 수학사를 공부하다 보니 이 책을 보는 눈도 수학사적인 관점이 조금 들어간다. 우리 나라가 해방된 이후, 사실 6.25가 지난 후의 학교 공부 관점에서 보면 많은 수학자와 수학 선생님 그리고 교육과정을 언급할 수 있지만 이와 함께 병행해서 참고서도 수학사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고 보아야 하겠고 이 부분에서는 단연 독보적인 위치를 점했던 책이다. 이 책 밖에는 없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반은 된다.


사실 이 책이 지금도 학생들이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현실이다. 다른 모든 것이 부침을 계속하는 동안 이 참고서는 중요한 위치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 상황에 맞게 변화하려는 노력도 있었겠지만 사실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은데도 말이다.


수학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은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은 좋은 문제를 많이 모아놓았다는 장점을 제외하면 교과서를 앞지르기 힘들다. 교과서의 정확하고 핵심을 짚는 설명, 꼭 필요한 내용만 모아 놓은 점, 그리고 특히 한 마디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에 비하면 일반 참고서들은 정말 엉망이다. 문제도 틀리고 설명도 틀리고 정의도 없고...  수학의 정석은 이에 비하면 비교적 낫다고 하겠지만 그래도 참고할 책으로서의 참고서를 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이런 책이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공부에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우리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변하지 않는 것은 학생들이 이런 참고서에 너무 의지하는 것이다.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을 공부로 끌어들이는 것은 선생님이 할 몫이지만 사실 아무런 방법도 주지 않고 그냥 교실에서 끌어들이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다. (교실에서의 방법은 약장사가 되는 것 뿐이다.) 참고서가 이런 부분을 대신한다. 하기 싫은 공부를 억지로나마 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은 조금만 읽어도 조금은 할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참고서이다. 문제는 이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수학을 제대로 시작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괜히 책 이야기를 하다가 수학 교육 이야기로 들어가는 듯한데 들어간 김에 한 마디만 더 하면 이렇게 공부한 후유증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수학공부를 하지 않았으면 지금 모든 분야가 더 탄탄해졌을지도 모른다. 단적으로 수학 올림피아드에서 상을 받은 학생들이 많이 수학과로 진학하기는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많은 뛰어난 인재들이 결국은 수학을 떠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이지만 큰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진짜 공부하는 데에 가면 지금까지 공부한 방법이 결코 도움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만 줄이기로 하자.


다시 수학의 정석으로 돌아가자.


첫 째, 이 책은 지금의 책과 비교하는 것은 조금은 무리가 있다. 이것은 마치 100년전 수학 전공 서적을 지금의 서적과 비교하는 것과 비슷하다. 정석은 처음 만들어졌을 때와 기술 방식이 거의 변하지 않았다.


둘 째, 이 책이 좋은 참고서가 아니라고 한 이 군의 말은 일리가 있지만, 이것은 이 책이 의도하였던 것이 문제를 풀이까지 쓰는 시험에 맞게 기술한 책이었기 때문이고, 현재 입시 문제 형식에서 보면 별로 깔끔하지도 못하니 좋은 참고서가 아니겠지만, 원래 의도대로라면 별로 나쁜 참고서가 아니다. 풀이를 쓰는 시험을 아직도 보는지 일본 참고서는 아직 이런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밖에 이 책의 표지가 너무해 보인다면... 이것은 정석 초창기 때랑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디자인을 할 줄 몰라서라기 보다는 아마 원래의 것을 고집한다고 보인다.


원래 쓰고 싶었던 것은 뭔가 다른 이야기였는데 시작하고 보니 너무 여러 가지가 떠오른다. 그냥 쓰지 말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두서 없는 이야기도 이유가 있을 것이니까 그냥 두기로 한다. (글 쓰는 사람이 나이가 든 것도 한 가지 이유.)


한 가지만 추가해 둔다면 수포자가 공부 못하는 이유가 교과서나 참고서가 나빠서라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일률적인 교과과정은 문제이다. (못하는 사람은 아래 학년 것을 늦게라도 공부하면 된다.) 하지만 교과서가 정말 사람의 마음을 끌어서 공부하기 싫은 사람을 공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아니면 교과서 설명이 너무 멋있게 되어 있어서 수학 공부하기는 싫어도 교과서만 읽으면 이런 싫은 수학이 머리 속에 남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더 큰 오산이다. 수학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은 그 수학이 재미있을 때 뿐이고, 재미있으려면 (1) 문제가 풀릴 때, 그리고 (2) 내용이 이해될 때 뿐이다. 그러니까 수포자는 모두 여기까지 못 와봤기 때문인 것이다.


혹시라도 수학은 어려운 것이어서 수포자 대부분은 그럴 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것 또한 크게 잘못된 것이다. 아무 수포자도 초등학교 수학에서 시작하여 어디까지는 잘 안다. (숫자 계산도 잘 할 것이다.) 자기가 아는데 까지 수학을 들여다 보자. 하나라도 어려운 것이 있는가? 그 위의 수학도 마찬가지다. 알고 나면 너무 쉽다. 다시 잘 말하면 익숙해지만 너무 쉽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싫어하면서 공부한다는 것은 천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수포자가 할 일은 첫째가 이것이 어째서 재미있는지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수학의 정석은 그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져다 주었다. 특히 홍성대 선배님은 수학의 정석으로 얻은 이익에서 후학들을 위해서 수학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셨다. 서울대에 처음으로 수학과 전용 빌딩이 생긴 것도, 이 분이 세운 상산고등학교도 이 밖에 우리나라 교육의 여러 부분이 이 분의 도움을 받았다. 이것만으로도 모범적인 참고서(!)라고 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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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M이 끝났다.

지난 1년 정도를 이에 대한 준비를 하며 지낸 듯하다.

정작 ICM의 본 행사에는 별로 참석하지 못했다. 이미 연구의 일선에서 멀어진 듯도 하고 History Symposium에 신경도 쓰이고, 앞에서 진을 다 빼 놓으면 마지막쪽에 있는 심포지움에서 제대로 못할지도 모른다. 특히 발표할 자료를 미리 만들어 두지 못해서 이 자료를 검토하고 작성하는 일을 병행하다 보니 발표를 들은 것은 Simons 교수님의 일반 강연, 개막식, Milnor 교수님의 Abel Lecture와 Mark Green 교수님의 Griffiths 교수님 연구 결과 소개 정도만을 들어가 들은 듯하다. 아 Hairer 교수님의 강의도 들어 보았다. 나머지는 시간을 내서 동영상으로 들어볼 예정임...


우리나라가 ICM을 진행하면서 아직 선진국과 같이 계획적으로 대회를 운영하지는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인도의 ICM에 비하면 100배 낫고 중국의 ICM 보다도 나았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미진한 점, 계획적이지 못한 점이 많이 눈에 띈다. 이것은 차차 경험이 쌓이면 나아지겠지. 단지 대회에 대한 예산이 마지막 순간에 가서 많이 깎인 점은 아무리 나라가 어려운 때이지만 국회가 더 계획적이 되어야 한다고 밖에는 말할 수가 없다. 원래 적은 예산으로 해야 할 회의라고 본다면 미리부터 이를 알려주어야 한다. 몇 년에 걸쳐서 계획하고 공고한 것을 예산만 깎으면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있다고 지금의 국회 의원들은 생각하는 것인지?


History Symposium은 마지막 이틀에 걸쳐서 열렸고 이 행사는 한국수학사학회가 IMU에 신청하고 IMU가 ICM LOC와 협의하여 진행이 결정된 형식의 심포지움이었다. 이 진행은 LOC가 주관하여 하는 것이므로 ICM의 본 행사이지만 우리나라가 계획한 행사 처럼 되었다. 이 계획을 실제로 시작한 것은 프랑스의 Chemla 교수님이었고 이 심포지움은 이 Chemla 교수님과 함께 계획하고 진행하였다. History Section (19)에 초청된 3분의 연사 말고 12분의 연사를 더 초빙하였는데 2분은 마지막 순간에 올 수 없는 사정이 생겨서 10분만 참석하였다. 영국, 미국, 캐나다, 중국, 일본에서 각각 한 분, 한국 둘, 프랑스 셋이다.


프랑스 파리 대학의 Chemla(쉐믈라) 교수님 (오른쪽)


더 많은 참석자를 모으려고 했지만, ICM이 배정해 줄 수 있는 시간에 한계가 있어서 이 정도로 만족해야 했다.


8월 19일에 초청강연 3분의 발표 이후, 2분 심포지움 강연을 듣고 저녁 식사를 같이 했다. 8월 20일에는 나머지 10분의 강연이 있었고 매우 수준 높은 강연을 들었다.


저녁 식사에 초대된 연사들


참석자 중에는 Siegmund-Schultze 교수님(위의 사진 왼쪽)에 동반하여 참석하신 June Barrow-Green 교수님(왼쪽에서 두 번째)도 계셨다. (옆의 Jeremy Gray 교수님과 환담 중) 내가 샀던 (아직 제대로 못 보았음) 삼체문제의 역사에 대한 책의 저자이다. 


두 번째 날에는 배정된 강의실이 30명 남짓 들어가는 작은 방이었다. 외국인 교수님들도 항상 수학사에는 좋은 방을 배정해 주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그런데 우리 학회 이장주 교수님과 그 방을 맡았던 두 도우미 학생의 활약으로 조금 지나서 방을 바꾸어 받을 수 있었다. 옆에 빈 방이 생겼는데 우리 방은 너무 들어오려는 사람들이 많아서 학생들이 본부에 건의한 듯. (이 사건의 배후에 이장주 교수님이 계셨다는 이야기가...) 덕분에 넉넉한 강의실 (넓이 두 배)에서 강연을 들었고 이 강연장도 꽉 찼었다.


이런 성황에 모든 강연자들이 만족했고 이 가운데 3분은 다음날에 우리와 함께 간송 소장품 전시회와 경복궁을 구경했다. 경복궁은 나도 2002년에 들어가 보고 나서 처음인데 놀라울 정도로 잘 단장해 놓았다. 예전의 썰렁했던 경회루 주변이 정말 잘 정리되어 있었고 장독대도 새로 만들어 놓았다. (너무 많은 중국 관광객 덕분에 마치 중국에 온 듯했는데, 이 분들은 중국말도 잘 하는 분들이어서 들리는 중국어 소리도 알아듣고 별로 이질감을 느끼지 않은 듯...)


어쨌든 예상 외로 성황리에 끝났고, 우리가 원했던 우리 나라 소개도 별 과오 없이 잘 한 듯하다. (우리 나라 역사/문화 소개, 우리 수학사 소개, 우리 학회 소개 등등...) 이 과정에서 학회 부회장님들, 여러 이사님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주셨고 이 분들은 중국에서 보다 더 감동한 듯이 보였는데... (음식이 중국보다 더 좋았을리는 만무고 사람들의 마음이 더 중요했을 듯...)


우리 나라의 현대미술관(MoMA)에서 수학 전시회를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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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29일부터 8월 1일까지 대전의 국가수리과학연구소(NIMS)의 CAMP 시설에서 "동서양 수학사 여름학교"가 있었다. NIMS의 후원을 받아 한국수학사학회가 주축이 되고 수원대 고영미 교수님께서 주관하여 조직하고 행사를 진행하였다. 나도 조직위원의 한사람이긴 했지만 행사 전날까지 외국에 있었던 관계로 행사에 즈음하여는 하나도 기여한 바가 없고 행사 중에도 시차 문제로 제대로 일을 했는지 모르겠다.


이 행사는 한국수학사학회의 여름 행사로 항상 있어왔던 태백 컨퍼런스 대신 열렸다고 할까 이를 희생하고 열렸다고 할까... 태백 컨퍼런스가 중요한 행사인데 올해는 국제수학자대회(ICM)가 서울에서 열리는 관계로 이와 관련된 행사를 하자는 아이디어에 따른 행사였다.


실제로 이 행사 동안에 숙식은 CAMP에서 전적으로 지원해주는 바람에 정말 쾌적한 공부 환경을 만끽할 수 있었다. 깨끗한 숙박시설에서 쉬고 행사장과 그 인근에서 제공되는 식사는 충분하기를 넘었다. 비록 CAMP에 준비되어 있는 수학 도서가 역사와는 많이 떨어져 있어서 제대로 활용하지는 못했지만 이 밖의 토론장과 강의실의 시설은 부족함이 하나도 없다. 마지막 시간에 감사의 인사 중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이 행사 동안 "이런 것이 잘 안된다"는 식의 말을 한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이 시설을 준비 운영하는 분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런 행사를 한 두번만 해 봐도 이런 말을 안할 수가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김동수 소장님이 정말 어려운 환경에서 고군분투 하고 계시는데 이를 직접 도와드리기는 힘들지만 그 분들의 노력이 수학계의 발전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고 있는지는 입이 열 개라도 다 말하기 힘들다는 점은 짚고 나가지 않을 수 없다.


거기서의 강의 내용은 대부분 현장에서 마련해 준 강의록을 보면 알 수 있다. 동양수학사에 6시간 강의와 2시간 워크숍, 서양수학사에 8시간 강의와 3시간 워크숍으로 이루어져 있어 사실 3박 4일 일정이면서도 실질적으로 1시에 시작하여 12시에 끝사는 3일 간의 일정으로는 벅찬 감이 있다. 특히 나의 제안으로 강의가 한 시간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많은 분들의 여름학교 생활을 너무 힘들게 한 것은 아닌지 걱정된다.


홍성사 교수님께서 정리하여 주신 동양 방정식론의 역사는 중국, 한국, 일본을 한 시간씩 나누어 정리하여 주셨으며 매우 균형잡힌 정리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동양 산학의 방정식 풀이법에서 산대를 이용한 풀이법을 직접 경험해본 윤혜순 박사님의 강의와 워크숍은 매우 신선했다. 말로만 들어 본 계산법을 직접 해 보면서 숫자로 써 볼 때랑 얼마나 다른 경험인지를 처음 느꼈다. 여러 해에 걸친 연구와 조사도 이러한 경험과 같은 것을 느끼게 해 주지 못했다. 역시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는 옛 말을 바꾸어 해 주셨던 옛날 선생님의 말씀 "백견불여일행(不如一見行)"이라는 말이 꼭 맞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장주 교수님의 재미있는 이야기와 역사적 추론은 또 다른 매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양 방정식론의 역사는 전체적으로 고영미 교수님의 작품이다. 전체 계획부터 자세한 내용까지 고영미 교수님의 각고의 노력의 결실이다. 이와 함께 장혜원, 한경혜 교수님의 강의도 새로운 역사적 안목을 뜨게 해 주는 강의였다. 준비가 미비한채로 강의에 임하게 된 나의 갈루아 이론은 역시 전체적인 이론의 조망도 다 감당하기 어려웠다. 안그래도 어려운 이론을 짧은 시간에 감당할 수 없어서 매우 간략한 조망으로 끝내고 마지막 시간은 이 여름학교 동안에 다른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며 생각하게 된 점들을 요약하여 이야기하는 것으로 마지막 시간을 마쳤다.


워크숍 시간에 참가자들이 보여준 열의는 모든 진행자들을 놀라게 하기 충분했고, 시작부터 끝까지 한 시간도 빠지지 않고 강의실에서 경청했던 참가자들의 열의 또한 사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시차로 잠을 잘 못자서 시간중에 졸음과 싸우느라 고생했지만 올라오는 길에는 보통 학회 때와는 다른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장의 사진 가운데 몇 장을 올려 놓아 본다.


시작 전에 강의 내용을 점검해 본다.


아리랑으로 시작된 환영사


홍성사 교수님의 강의


이재화 박사님의 강의


고영미 교수님의 강의


이상욱 교수님의 강의


강의중인 장혜원 교수님


내가 한 강의(워크숍)


한경혜 교수님 강의


이장주 교수님 강의


윤혜순 박사님과 임정미 선생님의 워크숍



저녁식사와 다음날 점심 식사



끝 시간 워크숍 장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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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Times라는 웹신문?에 컴퓨팅적 사고교육이라는 말이 나왔다. (http://goo.gl/3uBEZZ) 이 뉴스에 나오는 Computational Thinking이라는 말은 MIT의 수학자 Seymour Papert 교수가 처음 만든 말이라고 되어 있다. 이 Computational Thinking은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학생시절부터 뇌에 어떻게 HDD (요즘은 SSD)를 연결해서 기억력을 높일까 하는 상상을 했었는데, 이렇게는 아니더라도 컴퓨터를 옆에 두고 도움을 받으며 생각할 수 있으면 매우 도움이 된다. 실제로 우리 연구팀은 연구 과정에서 Mathematica라는 프로그램의 도움을 항상 받고 있다. 다른 패키지 프로그램도 똑같이 유용할 것이다.

 

그런데 이 신문 기사를 보니 아마도 이 창의재단 토론회에 참여한 분들은 모두 전산학과 전공분들인 것 같다. 하지만 Computational Thinking은 당연히 수학과 함께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아마도 각종 수학 및 응용수학, 그리고 수학을 사용하는 학문을 하는 분들이 모여서 이러한 토론을 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이런 사고방법에서 필요한 것은, 컴퓨터 언어와 이를 사용해서 모듈을 짜고 이런 모듈을 연결하는 그런 도움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에 이미 잘 만들어져 있는 패키지 프로그램을 활용해서 즉시 즉시 사고에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즉시 즉시란  1분, 1시간, 1일 과 같은 단위이지 프로그래밈을 하고 디버깅을 하는 1-2 주 내지는 몇 달도 요구되는 그런 도움은 아닌 것이다. 전산학과가 전공하고 가르치는 것은 이러한 패키지를 개발하고 제작하는 방법이고 이러한 패키지를 활용하는 것은 대학의 모든 전공에서 각각 하는 것이다. 


단지 이 세상 모든 일에서 컴퓨터의 도움을 받고 싶다면 어쩔수 없이 수치화 내지는 문자식으로 바꾸어야 하고 따라서 사람과 기계 사이에는 수학이 들어가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Computational Thinking이라면 사람과 컴퓨터 사이에 수학을 넣어 생각하는 방법이라고 바꾸어 말해도 된다. 너무 어려운 프로그래밍은 전문 프로그래머만 알면 되며 이것은 비교적 소수만이 필요할 것이고, 우리 국민 너도 나도 알아야 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에 컴퓨터를 연계짓는 방법, 조금 복잡한 문제에서 프로그래밍 없이 컴퓨터의 도움을 받는 방법이다. 이러한 내용을 잘 설명한 사이트가 있어서 한두 개 소개해둔다.


하나는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wiki/Computational_thinking

또 하나는 누군가의 블로그이다: http://goo.gl/X8eH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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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페북에서 본 이야기 하나는 초등학교 수학문제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아이의 답이 우스워서 댓글을 하나 달았지만...


각설하고 이 문제에서 생각할 점은 아이들 입장을 생각하고 문제를 냈으면 한다는 것이지만 이 문제의 내용이나 수준이 잘못되었다는 오해는 없으면 한다. 문제는 "왜 3671이 3609보다 큰지 설명하시오"라는 문제이다. 아이에 대답은 "이것도 이유가 있나?" 라는 항의식 답변. 아마 이것은 교과서 익힘책인가? 아니면 참고서에 나온 문제이거나.


이에 대한 댓글 가운데 몇 가지 들면

  1. 저는 다수의 의견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부모로서 저도 아이들 문제 보면 설명하기 어려운 문제들 봅니다만, 아이들은 이에 대한 내용을 학교에서, 교과서에서 배워 더 잘 알고 있습니다. 위의 문제라면, 학교에서 같은 자리수의 숫자 크기 비교는 가장 큰 자리수부터 비교한다 라고 배우는 거죠. 그래서 ... 천의 자리, 백의 자리 숫자가 같기 때문에 십의 자리를 비교하는 거라고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설명을 선생님이 분명히 하셨겠죠? 제 아이였다면 아이 의견을 인정해주되, 당연한 것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어 다른 사람에게 알려줄 수 있으면 더 좋다는 것과, 당연하다 여기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었을 겁니다. - "4학년학부모"님 
  2. 익숙해지겠죠. 풀이과정을 외울테니까. 그렇다고 창의력이 키워진답니까? 조금 더 싫어하게 되는거죠. 생각하는 수학은 무슨... 만드는 사람이랑 설명하는 사람이야 생각하겠지만, 배우는 사람은 포기하게 됩니다. 댁들이 하려는 건 그나마 외우기라도 하면 되던 걸 그것조차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 "쓰리고"님
  3. 현직 초등학교 교사입니다. 사실 저도 요즘 교과서 보면 '왜 그런지 설명하시오.'나 '이 단어를 넣어 문장을 만들어 보시오.' 같은 문제가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옛날 교과서랑은 너무 다르죠. 요즘은 연산보다 수학적 의사소통을 중시해서 그렇습니다. 즉 자신에겐 당연한 것도 더 어린아이에겐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데, 그걸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을 요하는 거죠. 나아가서는 어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전문 분야를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능력의 초석이 됩니다. - "초등교사"님
  4. 웃자고 올리신 글이겠지만, 외국에서처럼 논리력을 키우려면 필요한 문제인 듯 싶네요. 그리고 학교에서도 충분히 수업한 내용일 거구요. 수학교육이 제대로 되어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회 과목이나 과학 과목도 중요하고요. 아이들이 계속 문제나 현상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문제들이 좋은 문제죠. 생각하는 힘을 길러주니까요. 다음부턴 같이 생각해보자~라고 하시면서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지도해 주시면 좋겠네요. - "ㅎㅎ"님
  5. 숫자는 관념적인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그것을 이성적으로 분석할 능력까지는 가지지 못하는게 당연한 겁니다. 오히려 당연히 큰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머리속에 표상으로서 숫자가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겠죠. 초3이 저런 문제를 푼다는 것 자체가 주입식 교육의 폐해입니다.

이런 답글들이 달린다. 아마도 대부분 자신의 주변에서 경험한 바에 따른 것이리라. 언급하고 싶은 것은 이들의 차이가 대단하다는 것이고 꼭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이러한 차이를 야기하는 것은 무엇일까? 또 해결방법이 있는가? 한 50%라도 해결할 수 있는가?


나의 댓글은 

문제를 내는 사람이 줄여서 생각하는데 익숙해져서 문제라 어구대로 해석하면 이상하지만... 

"어떤 물건이 3671 있으면 3609개보다 많다. 사실을 3671 3609라는 ( 표현으)로부터 알아냈다면 이를 어떻게 설명할 있을까?" 

이런 식으로 문제를 만들면 저런 일은 생기겠죠. 혹시 이렇게 내면 문제를 이렇게 꼬아 냈어 하는 식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생기려나?

였다. 


그런데 어떤 학생은 저런 문제가 도움이 되고 어떤 학생은 안된다. 모두에게 저런 능력을 키워주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 방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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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는 TeX 학회가 있다. 아마 전 세계에 TeX 학회가 있는 나라는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이 학회는 매우 부지런해서 다른 학회 수백명의 active한 회원을 가지고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한손가락 꼽을 active 임원들만 가지고 모두 다 한다. 최근 10년 동안 해 놓은 일만 보아도 입이 벌어진다고 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일이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정말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점은 다른 학회와도 많이 다르다.


이 학회는 매 년 학술대회 말고 문서작성 워크숍이라는 것을 연다. 대략 이맘때쯤 하는데 근래에는 대부분 공주대학교에서 열렸다. 전 회장님이 공주대학교에 계시는 관계로 계속해서 이 대학의 지원을 받게 된듯하다. 이 모임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도록 열린 워크숍이다. 하지만 열성 팬이 아니면 별로 참석하지 않는다. 나도 몇 번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올해도 이 모임이 11월 9일에 공주대학교 구내 백제교육문화관이라는 삐까번쩍한 건물 국제회의실 205호에서 열렸다. 


요즘이 단풍철 막바지란 것을 생각지 않고 2시간 잡고 고속버스를 탔더니 고속도로 버스전용차로가 다 막혀서 같이 서 있어보기는 처음이다. 결국 2시간 30분이 좀 더 걸렸고 강의를 1개 반을 놓쳤다.


이 모임의 후기는 안그래도 "날쌘" Progress 님의 후기가 모든 것을 요약하고 있고 홍페이지에서 내가 찍어 올린 동영상을 보면서 올라와 있는 자료들을 함께 보면 (앞의 한 개 반을 빼고는) 대략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므로 따로 적지는 않는다.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시는 분의 하나인 DeHi님 얼굴을 보지 못한 것 정도...


단지 한 가지 새로운 소식은 이제 한글 TeX인 ko.TeX이 세계 2대 TeX Distribution인 MikTeX과 TeX Live에 모두 탑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아무데서나 이 대표적인 텍을 (full로) 깔고나면 그 순간에 한글로 컴파일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업데이트도 바로바로 될 것이다. 이제는 (서양에서는 아니겠지만) unicode가 널리(?) 사용된지도 몇 년 지났고 XeTeX도 제 자리를 잡아가고 있으니 (이제는 pdfLaTeX과 크게 차이도 안나고 에러도 거의 없다.) TeX의 발전이 눈부시다고 하겠다.


초창기의 plain TeX과 여기에 amsppt를 얹어 쓰던 시절에서 LaTeX이 나와서 오랜 동안 TeX계를 평정했는데... 그리고 이 동안에 여러 형태의 한글 텍이 자리를 바꾸었는데 이 모든 것이 모이고 수정되어서, TeX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Xe(La)TeX과 Lua(La)TeX에 맞추어졌으니까 한글 사용자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어보인다. 이제는 한글을 모두 찍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옛한글도 다 찍을 수 있고 동양에서는 한자도 대략 6만자 정도를 감당할 수 있는 상태가 되었고, XeTeX 등이 중국 글꼴을 사용할 수 있게 하여주므로 글꼴이 모자라 한자 자리가 비어 나오거나 하는 것도 이제는 옛말이 되어 간다.


위의 홈페이지의 사진에 얼굴이 비친 많은 분들은 (나는 물론 빼고) 모두 이 TeX의 역사에 초석을 놓은 그리고 지금도 놓고 있는 분들이라고 하겠다. 이분들의 노고에 답하는 것은 KTUG 홈페이지에 열심히 *제대로된* 질문하는 것? 특히 형식을 갖추어 (테스트 파일을 첨부하여) 질문하는 것이 첫번째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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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포항공대 박형주 교수님이 국가수리연의 수학원리응용센터장으로 부임하셨다. 이 기회에 박교수님을 인터뷰한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는 수학이 나라 발전에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박교수님의 이야기를 통해 잘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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