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대학교에서 수학사 워크샾이 있어서 참석차 일본을 다녀왔다.

일본은 놀러 한 두번 갔었지만 공부하러는 처음 간 길인데, 하던 가락이 있어서 이번에도 주로 놀다 왔다.


교토가 일본에서는 꼭 가봐야 한다는 곳이어서 궁금하기도 했지만 발표도 하나 해야 해서 조금 신경쓰이는 여행이었다. 여러 분들이 동행했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그리고 재미있게 여행을 마쳤다. 교토를 간 길은 오사카 부근의 간사이 공항에 내려서 리무진 버스를 타고 교토로 왔다. 어떤 호텔 앞에서 내려서 그곳에서 늦은 점심식사를 하고 택시로 우리 호텔로 왔다.


이곳은 매우 저렴한 작은 호텔로 방은 좁지만 깨끗은 하다. 아침 식사가 1050엔에 부페식인데 음식이 괜찮았다. 야채가 많고 육류, 밥, 등과 함께 차와 커피까지 모두 만족스러웠다. 화려한 호텔의 서양식 식사가 아니라 조촐한 일본식 퓨전 식사 정도 된다고 할까. 사진은 찍은 것이 없는 듯. 다른 선생님 사진을 얻어야 하겠다.


호텔은 교토시 3조(条) 구역의 가와라마치(河原町)에 있었다.

첫날은 오후에 나와 교토시 반대쪽의 天龍寺 뒤에 있는 竹林을 보러 갔다. 버스를 타고 갔는데 도착하니 해가 지려고 하고 있었다. 근처에서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먹고 올라가서 죽림을 얼른 보고 내려왔다. 죽림 속에는 노노미야(野宮)신사도 있었는데 이 신사는 켄지(原氏)이야기에 나오는 장소라고 써 있었다. 


노노미야 신사의 팻말


내려와서는 버스를 내린 곳의 좀 넓은 개천(이름은 桂川)을 건너 중지도를 지나 개천 건너편의 전철 종점에서 전철을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4조(기온祇園)에서 스키야키를 먹고 왔다.


둘째 날은 교토를 보기로 했는데 날이 너무 더웠다. 여러 곳을 보기로 했지만 결국은 두 군데를 보았는데 오전에는 키요미즈데라(淸水寺)를 보고 오후에는 킨카구지(金閣寺)를 보았다. 청수사는 한참 걸어서 올라갔고 절 앞에는 많은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아마 본당이겠지? 옆에서 본 받침 구조가 어마어마하다. 그리고 지붕은 삼나무를 잘게 찢어서 초가처럼 얹었다고 홍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셨다.



돌아 내려오다 빙수를 한 그릇씩하고 홍교수님은 학회 시작을 보러 가셨고 나머지는 아래로 내려와서 버스를 타고 금각사로 향했다. 금각사 앞에 맛있는 소바 집이 있다고 해서 거기 가서 소바를 먹었는데 어두워 흔들려서 사진이 엉망. 국물은 소바마다 맛이 달랐는데 모두 맛있었고 우리는 잘못해서 대부분 온면을 먹었다. (온면도 맛있는 집.)



금각사 구경을 끝내고 우리는 집에 돌아왔는데 내일 발표를 준비하는 목표. 다른 이들은 조금 더 돌아보기로 했다. 우리는 저녁때 다시 만나서 저녁을 먹으러 갔는데 가려했던 곳이 만원. 그래서 옆에 있는 경양식집에서 간단한 요기 거리 몇 개와 맥주 세 조끼로 저녁을 대신하고 잤다. 


다음 날은 발표날이어서 하루 종일을 교토대에서 보냈다. 유명한 연구소인 RIMS에서 하는 워크숍이지만 그날은 RIMS 입학생들이 입시를 본다고 해서 그 옆의 더욱 훌륭한 Maskawa 빌딩을 사용했다. 오전에 조금 앉아서 준비를 하고,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 먹고 오후에는 한국 산학에 대한 발표를 듣고 또 발표를 했다. 저녁에는 만찬이 준비되어 있어서 만찬장까지 걸어가서 괜찮은 부페 만찬을 했다. 사람들은 모두 즐거운듯.


유명한 RIMS 입구이다.


즐거운 만찬장 분위기.


다음 날은 나라(奈良)다. 나라까지는 기차를 타고 갔고 거기서도 결국 두 군데를 보았는데 첫번째는 토다이지(東大寺)이고, 두번째는 호류지(法隆寺)이다. 토다이지는 매우 더운 시간에 들어갔고 정말 큰 건물과 부처상을 모신 것이었다. 조금 일본식이라고 생각되었다. 구경을 마치고 나오니 점심시간이 가까워와서 역 근처에서 부페식 점심을 먹었다. 더위에 지쳐서 점심을 먹고 근처의 커피샵에서 앉아서 몸을 식히고 나서 법륭사를 향해 떠났다. 기차를 타면 편한 것을 버스를 타서 시간이 꽤 걸려서야 도착했는데 여기는 일본 분위기는 없지 않지만 꽤 편안한 느낌인 것이 한국에 온 것 같기도 하였다. 기분 좋게 본관과 동원을 보고 나니 막차시간이다. 서원의 건물 한두개는 포기하고 버스, 기차타고 교토로 돌아왔다. 



법륭사의 마당이다.


법륭사는 담징(맞나?)이 그렸다는 금당 벽화가 유명한 곳이고 바로 옆에 금당이 있다. 많이 지워져가는 벽화를 철창 밖에서만 볼 수 있었고 뒷뜰로 가니 쇼오토쿠(聖德) 태자의 업적을 기려 만든 박물관이 백제 이름을 달고 있었다. 

JR 교토역에 도착해서 소바 등으로 저녁을 마치고 호텔에 와서 잤다.


다음날은 귀국일. 오전에 홍교수님 등은 학회 closing을 보러 가셨고 나는 한 두가지 souvenir를 사고 짐을 싸니 시간이 다 됐다. 점심은 오무라이스였고 모두 모여 버스타고 떠나서 간사이 공항에서 항공편으로 집에 온 것은 밤 9시 경인듯.


이정도 여행도 이제는 힘이 들다. 엄청 많이 걸어서 나중에는 아침부터 다리가 아팠는데... 그래도 커다란 관광명소를 잘 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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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용이가 고등학생 문제 풀어주다가 \( 2 \times 2 \) 행렬의 \( n \) 승 멱이 가지는 성질을 발견했다고 해서 증명을 어찌하는가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겠지만...


TeX을 사용해서 이 블로그에 쓸 수 있으니까 오랜만에 한 번 써보자. 근데 AMSTeX 명령도 듣나?




문제는 \( A=\begin{pmatrix} a & b \\ c & d \end{pmatrix} \) 라고 하면 \( A^n \) 의 두 entry에 대해서 \( a_{12}:a_{21}= b:c \) 라는 것이다.




\[ A^{n-1}=\begin{pmatrix} e  & \alpha b \\ \alpha c & f \end{pmatrix} \]


라고 하자. 그러니까 수학적 귀납법을 써서 \( A^{n-1} \) 에 대하여도 성립한다고 하자. 그러면


\[ A^n=A A^{n-1}=A^{n-1}A \]


이다. 그러니까 위의 표현을 이 두 가지로 계산하면 같아야 한다.

이 표현에서 해당하는 (1,2) 원소와 (2,1) 원소는 각각 \( b(\alpha a + f) = b (e + \alpha d) \) 와 \( c(e + \alpha d) = c(\alpha a + f) \) 이다. 여기서 \( \alpha a + f = c + \alpha d \) 가 항상 성립한다는 것을 알 수 있고 \( A^n \) 에 대하여도 가설이 성립한다. \(n=1\) 일 때는 확인하지 않아도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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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에서 점심을 마친 일행은 영도로 들어가 해양박물관을 구경했다. 해양대학 근처에 세워진 건물이면서 꽤 큰 규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내용은 별로 볼 것이 많지 않았다. 역시 수족관이 커야 하겠지만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수족관 수준으로 그리 크지 않은 것 하나 뿐이어서 아쉽다. 동식물을 보여주는 것은 별로 많지 않았고, 이보다 나은 것은 우리나라 옛 선박의 모형과 역사적 자료를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몇 가지 새로운 것, 유물 등을 관람하고 3층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몇 가지 논의를 한 다음 다시 부산역으로 향했다. 


부산역 맞은편의 차이나 타운에서 유명하다는 만두집을 찾아 들어갔다. 여기서 우리나라 중국 음식의 진수를 맛볼 줄은 몰랐다. 푸짐한 탕수육과 깐풍새우(?) 두 접시에 6명이 넉넉히 먹고 추가로 시킨 찐만두와 물만두 두 접시는 거의 남길 뻔 하였다. 다른 상에 앉은 젋은이 4명은 우리와 비슷하게 먹었다. (만두만 한 접시로 줄인 정도) 비가 많이 오는데 택시로 다시 영도로 들어와 고신대학교를 찾아 올라갔다. 산 정상 부근에 학교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안개가 끼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채로 학교 기숙사에 들어와 잤다. 


기숙사는 정말 깔끔했는데 아마 게스트룸이었던듯. 편안하게 10시 좀 넘어서 잠을 잤고, 아침에 7시 반 정도까지 잤으니 푹 잤다. 일어나서 샤워하고 안개낀 캠퍼스에서 사진을 조금 찍었다.



약속한대로 9시가 되어서 계영희 교수님의 안내로 발표장인 월드미션센터로 향했다. 안개가 낀 캠퍼스를 걸어가며 찍은 사진이 위의 사진이다. 오른쪽 안개 속에 잠긴 건물이 월드미션센터이고 홍성사 교수님과 계영희 교수님이 걸어가시는 모습이 보인다. (이 사진에서 사진사의 키가 앞에 보이는 두 사람보다 큰지 작은지 알아내 보십시요.)


여름컨퍼런스를 하게 된 발표장은 새로 지은 건물에 아주 깨끗한 교실이어서 웬만한 세미나실 보다도 더 좋다. 여기에 고신대학교 학생들이 전날 떡과 과일, 차와 과자 등을 정말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아침 식사를 제대로 했다고 할 정도로 대접이 좋았다. 참석하신 분들도 20명이 되고 고신대학교 학생들도 도우미 겸 와서 있었다. 발표장이 꽉 찬 느낌이었다. 오전에 홍성사 교수님께서 일본의 세키 타카카즈가 일으킨 일본 산학의 특징을 이야기해 주셨다. 계속해서 조재근 교수님의 통계학사와 김종명 교수님의 삼각법의 역사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점심은 고신대에서 많이 멀지 않은 고기집에서 푸짐한 갈비를 먹었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발표장으로 돌아와서 오후 세션을 계속했다. 오후의 유일한 발표는 박창균 전회장님의 발표였고 수학의 방법론을 잘 정리하여 소개해 주셨다. 곧이어서 이상욱 부회장님의 수학사 연구의 방법과 그 의의에 대하여 여러 수학사가들의 관점을 설명해준 워크숍이 있었다. 청중에게 질문도 하시고 해서 1시간이 길지 않은듯 잘 듣고 이어지는 break에 홍교수님 내외분은 일찍 서울로 향하셨다. 너무 늦으면 힘드셔서 우리도 나가 배웅하고 나머지 워크숍을 계속했다.


둘 째 시간은 고영미 교수님께서 19세기 초반의 duality의 성립 과정에서 있었던 일종의 paradox 같은 문제를 수학자들이 어찌 해겼해 갔는가를 설명해 주었으며 이것은 사영기하학을 강의할 때 꼭 가르쳐 주고 싶은 내용이었다. 아직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3차곡선을 가지고 한 번 계산해 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짧은 40분 동안에 사영기하의 기초부터 다 강의하느라 정말 속도감 있게 이야기하셨는데 나중에 시간을 가지고 계산을 해 보아야겠다. 


마지막 시간은 내가 19세기의 기하학 발전과 클라인의 Erlangen 목록을 번역하는 작업에 관하여 이야기하기로 했었지만, 화요일 밤에 왕승호박사와 이야기하던 것이 머리에 남아 있고 정작 이야기 해야 할 내용은 별로 더 읽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새로이 생각하게 된 것을 이야기했다. 결국 처음으로 발표자료를 준비하지 않고 발표를 하게 되었다. 내가 한 이야기는 별로 정리되지 않은 이야기어서 조금 더 생각해서 정리를 해야겠다고 생각이 된다. 


최대한 빨리 컨퍼런스를 마치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부산역에 도착하여 롯데리아에서 간단히 저녁을 해결하고 졸면서 KTX를 타고 서울역에 도작한 시간은 9시 15분. 예정보다 3분 늦었다. 지하철로 갈아타고 집에 들어오니 식구가 모두들 기다리고 있는 듯. 큰애만 나보다 늦게 퇴근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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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학회를 거퍼 했다. 아마 욕심이 과한 탓이리라.


우선 AMC2013은 아시아 수학자들의 모임이다. 별로 계획이 잘 되지 못한 듯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생각보다는 잘 치루어진 것 같다. 부산 벡스코에서 6월 30일(일요일) 저녁 무렵부터 시작하여 7월 4일(목요일) 점심 때 끝났다. 내가 맡은 것은 Session 1의 sub-organizer쯤에 해당되는 일이다. 세션 1은 3 가지 전공이 함께 묶인 세션이어서 각 전공마다 한 분씩 3명의 오거나이저를 가진 세션이다. 나는 수학사 파트를 맡았고 국내 2명 국외 2명의 invited speaker를 모셔왔다. 발표할 사람이 없으면 어쩌나 하고 우려했는데 아시아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발표를 신청하여 배정된 시간 slot을 꽉 채웠으니 예상 밖의 일이다. 


수학사 파트는 화요일 저녁에 시작하였지만 나는 일요일 저녁부터 가 있었다. (덕분에 일요일에 김홍종 교수가 조화평균에 대하여 소개하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강연도 들을 수 있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한 이틀은 학회는 신경쓰지 말고 이 학회 이후에 계속해서 열리는 수학사학회의 여름컨퍼런스에서 발표할 내용을 준비해야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학회장에 오고 이사람 저사람 만나고 하다 보니 책을 들여다볼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화요일 밤에는 나랑 같은 숙소에서 묵은 왕승호 박사와 밤 늦게까지 수학 이야기를 하다 보니 결국 나중에 내가 발표한 내용은 이 때 이야기한 내용으로 대체되게 되었다.


화요일 오후의 발표는 이상구 교수님의 발표로 시작되었고 네팔에서 오신 교수님의 발표 하나로 끝났다. 또 한 분의 발표자는 결국 오지 못하여 발표가 cancel 되었다. 저녁에는 만찬이 있었는데 수백명 (아마 6-700명 정도)의 참가자가 부페 식사를 하는 것은 거의 disaster라고 할 수 있겠다. 긴 줄을 참고 서고 나중에는 새치기 아닌 새치기도 하여 decent한 식사를 마쳤다. 후반에 연주를 해 준 국악 연주단은 동양 몇 나라의 노래를 연주해 주어서 조금 나았던 듯. 부페이다 보니까 식사를 하면서 주최측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었고 아무리 짧게 해도 여러 명의 이야기는 시간을 끌 수밖에 없어서 옥의 티라고 아니할 수 없다.


화요일 밤의 열정에 찬 공부 (나에게만 일방적인 공부) 덕분에 수요일 아침에 늦잠을 잤다. 8시 30분에 시작하는 세션에 거의 30분 늦게 도착해서 첫 발표는 못 듣고 둘 째 발표인 한경혜 교수님 발표도 반 밖에 못 들었다. 하지만 취안징 교수님의 발표는 제대로 들을 수 있었는데 우리가 생각하는 역사와 관련된 사항들은 잘 집어서 새로운 방법론으로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된다. 모두 극찬을 한 발표였다. 


수요일 오후에는 수학사학회의 임원진과 편집진이 회의를 했다. 회의를 마치고는 초청강연자 두분과 함께 광안리 식당에 가서 회를 중심으로 한 한식을 먹었다. 식사는 괜찮은 수준이었고 두 분은 꽤 좋아한 듯하다. 숙소에 돌아오니 왕승호 박사가 컴퓨터가 고장나서 작업을 할 수 없다고 미리 서울로 간다고 나오는 것을 현관에서 마주쳤다. 보내고 들어와서 일찍 잤다.


목요일은 늦지 않아서 아침 강의부터 다 들었다. 첫번째 발표는 원래 대학원생이어서 구두 발표가 맞나 포스터 발표가 맞나 고민한 친구인데 발표를 들어보니 의외로 멀쩡한 내용이었다. 포스터 발표를 시켰으면 후회했겠다는 생각이 드는 내용이었다. 대수기하학의 발전 과정을 공부하면서 divisor의 관점에서 각 단계를 분석하고 있으니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다. 3번 째의 모리모토 교수님의 강의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고, 특히 시작할 때에 지적한 우리 ICM2014의 한국 수학사 부분의 기사 내용에서 잘못 된 부분을 지적해 주어서 얼굴을 둘 데가 없었다. 준비 위원회가 바쁜 관계로, 또 한국수학사의 내용에 대하여 별로 잘 알고 있지 못한 관계로 제대로 검토되지 않은 원고를 인터넷에 올려놓은 것이리라. 그래도 학회에 한 번쯤은 문의를 하고 조언을 구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구체적으로 작업을 한 사람은 잘 알고 있는 친구이어서 이야기를 전하는 선에서 줄이고, 그 내용을 모리모토 교수님이 지적하기 전에 상의를 해서 한국수학사학회 차원에서 검토 보완해서 다시 실을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외국 분에게 지적까지 당하고 보니 조금은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목요일 마지막 시간은 홍성사 교수님께서 13세기 중국의 주세걸이 쓴 산학계몽이 조선과 일본의 산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와 함께 이 두 나라 산학의 비교 발표를 해 주셨고, 그 차이가 생기게 되는 이유에 대하여 문제를 던져 주셨다. 마지만 시간인 김민형 교수의 plenary talk는 들어갈 수 없었고, 우리는 서둘러 지하철을 타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1시간 가까이 걸려서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역 맞은편의 밀면집에서 밀면과 만두로 점심 식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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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입시와 관련된 논의가 오간다. 어려운 문제에 어려운 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답이 없는 문제에 모든 사람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혼란은 가중된다.


최수일 선생님께서 논의하시는 올해 입시 문제 해결책에 대한 토의를(2013년 6월 18일) 보았다. 몇 분이 좋은 의견을 올려주시고 논의도 심도있게 진행되는 듯 싶다. 그러나 여기서도 내가 예전에 지적했던 한 두 가지 기본적인 사항을 간과하는 듯이 보여서 여기 지적해 두고자 한다.


우선 논의하시는 문제에서 대학도 입시도 고등학교도 학부모도 모두 잘못이 없다. 모두 현재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 하고 있다고 보인다. 시험이라는 것은 두 가지 역할을 한다. 그것은 학생들이 학습한 결과를 평가하는 것과 함께 이 평가를 (선의로) 반영함으로써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입시는 이 두 번째 것에 들어간다. 


입시가 과열되는 이유는 대학에 서열이 있기 때문이다. (학생을 줄세우는 것은 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학 사이의 격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죽어라고 하나라도 나은 쪽으로 가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 대학 사이의 격차가 너무 없어도 안되겠지만 너무 큰 격차를 줄여주는 것은 정부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위 링크의 제 글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만일 교과과정을 줄여서 시험범위가 줄어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나머지 시험범위에서 입시문제를 어렵게 내는 것이 아니고 (문제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이 문제는 별로 큰 문제가 아님), 나머지 만으로는 변별력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 변별력이 적은 문제에서는 사교육이 매우 큰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사교육을 없애는 것이 아니고 사교육이 교육적인 목표를 향해서 쓰일 수 있도록 해 나가는 것이지요. 사교육으로 본질적인 공부는 하지 않고,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이상한 방법만을 익혀서 점수만 높이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최수일 선생님께서 물어보시는 몇 가지 질문에 대하여 생각해 봅니다.


(2) 기하와 벡터가 수능 시험범위에서 빠지면 시험이 쉬워지는가? 

저는 그렇다고 봅니다. 나머지에서 어려운 문제를 내어도 조금은 쉬워질겁니다.


(3) 수학이 왜 변별력을 책임져야 하는가?

변별력이 줄어들면 교육부나 대학이 싫어하는 것은 맞지만 이것만이라면 변별력이 조금 줄어도 되겠지요. 하지만 위에 말씀드린대로 변별력이 줄어들면 나쁜 사교육이 판치기 때문에 꼭 변별력을 늘여야 합니다.


(4) 기하와 벡터를 가르치지 않으면 학력이 저하되는가?

물론 많이 저하됩니다. 기하와 벡터까지는 아니더라도 중학교의 기하만 해도 많은 능력을 키워주는 과목인데 지금은 그 내용이 너무 줄어서 우리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아마도 중국 사람들의 능력(potential)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기하문제를 풀수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에 닥쳤을 때 도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고요. 이와 관련해서는 고인이 되신 Kodaira 교수님이 생전에 계속 주장하시던 것을 알아보시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일 듯합니다.


마지막으로 교육과정의 운영 방법과 관련해서는 어떤 선생님께서 제안하신 바대로 3학년 1학기까지 모든 교과과정을 모두 떼고 수능 전후해서부터는 전혀 다른 것을 공부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지 합니다. 그리고 그 2년 반 동안에 기벡을 네번 떼든지 무엇을 하든지 학교가 학생들하고 상의해서 할 문제라고 보입니다. 혹시 학생들 사이에 의견차이가 있다면 반을 나누어서 네번하고 싶은 학생, 한번 깊이있게 하고 싶은 학생 등등으로 따로 운영하면 안될까요? 혹시 교육부가 이런 것을 제한하고 있다면 쓸데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당연히 학생들은 자기가 교육받고 싶은대로 교육받을 권리가 있겠고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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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어떤 대학 교수님이 클레이 재단이 걸어놓은 수학의 7대 난제 가운데 하나를 풀었다는 기사가 났고 이에 대해 몇 분께서 이 상황을 해설하는 페북과 블로그의 글들을 쓰신 것을 보았다. 이 가운데 박부성 교수님의 해설 글이 상황을 잘 설명해 주셨었는데 다시 신문 기사로 보게된 이철희 교수님의 글은 자세한 설명과 날카로운 해석이 돋보이는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드는 걱정은 다음 두 가지다.


1. 수학자로서, 미분기하학자로서 이 설명을 읽고 드는 생각은 이 논문이 클레이 재단의 상에 대한 대상에 들어갈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교수님이 걱정하는 것처럼 나중에 이것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어떻게 될까? 혹시 일반 사람들 중에 이 해프닝의 결말이 궁금했던 사람은 혹시 조 교수님의 논문이 사기였다 라는 식으로 반응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있다. 비록 이것이 수학 문제를 해결하는 논문이 못되었더라도 물리학 논문으로서는 훌륭한 논문일 수 있는데 말이다.


2. 또 다른 가능성으로 클레이 재단에서는 별 성과를 못 얻었는데 물리학적으로는 훌륭한 논문임이 입증되어서 물리학의 훌륭한 상을 받았다고 하자. 그러면 혹시 일반 사람들은 이 논문이 상을 받아야 마땅한데 수학자들은 옹졸하게 상을 주지 않고 물리학에서 결국 상을 받고 말았다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있다.


어쨌든 이런 복잡한 상황을 만든 것은 제대로 검토되지 않고, 전문가의 해석을 들어보지도 않은 보도진 측에 잘못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위의 걱정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사실 이 기자분들 가운데 가장 이러한 과학 방면에 정통한 분들도 어쩌면 이 사건에서 오가는 위와 같은 이야기가 무슨말인지 하나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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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동흔 선생님이 페북에다 올려 주신 책이 있다. 이름하여 Symmetry라는 책이고 몇 년 전에 미국수학회에서 대학 학부 학생들을 위해 출간하는 수학교과서 시리즈에 행렬군으로 리군의 이론을 소개한 좋은 책을 쓴 분이 새로 쓴 책인가보다. 책의 내용은 보지 못했지만 링크에 있는 목차만을 보고 이 책이 괜찮은 책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책은 읽어봐야 알겠지만 지난번 책이 간결하게 잘 설명되어 있었던 것을 보면 이번 책도 지지하게 풀어쓴 책은 아니리라는 생각이고 여러 장의 뒷부분에 있는 절의 제목을 보면 조금은 폭넓은 예까지 다룬듯 보여서 판에 박힌 내용만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다. 구체적으로는 군group의 이론을 설명하는데 구체적인 예로서 변환군transformation group을 주제로 잡아 이것을 보면서 군의 이론을 알아보겠다는 식으로 설명한 책일 것이라고 추측해본다. 이것은 매우 좋은 아이디어이다. 실제로 갈루아Galois가 군의 이론을 처음 만들었들 때 갈루아도 이런 것 중의 한가지를 생각하고 있었지만, 아마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많은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러한 아이디어를 싹틔우고 있었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다.


내가 처음 대수학을 배울 때 군론은 추상적인 이론과 구조적인 아름다움에 깊이 매료되었던 과목이지만 사실 구체적인 예가 너무 부족하여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너무 대수적인 예들만 보면서 당연히 그런것을 다루는 이론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나중에 기하학을 전공하고 나서 보니 이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풍부한 예를 가진 분야였다. 물론 학부 때 내가 들었던 군론 강의 중의 하나에서 박승안 교수님께서 설명하시면서 비록 군론을 공부할 때 유한군 또는 이산군론을 먼저 배우지만 사실 이 이론은 모두 리군Lie Groups의 이론에서 비롯되었다고 여러차례 강조하셨다. 하지만 이 이론은 대학원에 가야 배울 수 있는 어려운 이론으로 치부되어서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보면 이것들을 당연히 함께 공부했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책이 그에 필요한 내용을 잘 소개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갈루아가 군론을 만든 때에서 10년이 지나서 리Sophus Lie가 태어났다고 되어있다. 그러니까 리가 그의 리군 이론을 만든 것은 갈루아보다 몇십년 늦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이 상미분방정식의 계로서 리군의 변환에 잘 따라 움직이는 방정식은 그 해들도 그러한 좋은 성질을 가진다는 것을 설명하려는 것이었다면 이것은 지금에 보아도 상당히 어려운 이론이다. 오히려 이보다 조금 늦게 클라인이 에를랑겐 목록Erlanger Program을 발표할 때 사용한 변환군의 개념에 오면서 훨씬 더 구체적인 공간의 움직임에 대한 변환군으로써 이해하기 쉬운 대상이 된다. 자세한 상황은 잘 모르지만 클라인이 기하학적 변환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갈루아 전후해서부터 이러한 공간적인 변환을 사용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되고, 이러한 바탕에서 리가 미분방정식에도 변환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이론을 발표하자 클라인이 거기 필이 꽂히게 된 것일 것이다. 즉 클라인은 리가 소개한 방법인 하나의 변환을 보지 않고 변환 전체를 군으로 보면 설명이 편하여진다는 것을 처음 일반적인 방법론으로서 간파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갈루아가 처음이지만 갈루아는 이산군만을 생각했고, 연속군을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니까.) 즉 일종의 패러다임 쉬프트가 일어난 시점들이다.


추측성의 역사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나로서는 이러한 내용을 알수 있었으면 공부가 훨씬 편하고 이것을 더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동흔 선생님은 이러한 내용을 고등학교 학생들의 공부에 잘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지금의 학생들은 복받은 학생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마디만 사족을 붙이면, 위와 같은 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내가 공부한 것처럼 예를 별로 많이 주지 않고 공부하는 방법이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런 방법의 장점은 이론을 많은 구체적인 예가 없이 파악해 내면서 다른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 새로운 돌파구나 응용가능성 찾아내는 일이 종종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흔한 것은 아니지만...) 즉 많은 구체적인 예를 주는 것은 이해의 깊이를 깊게 해 주지만, 반대로 창의성의 눈을 가려버릴 수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인다. 선생님 노릇 하기 어려운 것은 이 양면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고, 특히 학생 개인마다 이것이 다르다는데 딜레마가 있다고 하겠다. 


그래도 이동흔 선생님은 특유의 재간으로 학생들에 맞는 공부거리를 만들어주시는 것 같다. 이런 재주는 흔치 않은 것이니, 아마 지금 학생들이 받은 복은 이런 좋은 설명이 있다는 것 차체 보다는, 이런 설명을 적절히 선별해주시는 선생님을 만난 복이 더 큰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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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고등과학원 5층 강당에서 2013년도 TeX 학회 정기 학술대회가 열렸다. 

출범한지 6년인가? 그 동안의 발자취를 짚어본다는 취지의 행사 주제 아래서 많은 발표가 있었다. 나는 다른 일이 함께 있어서 한층 아래에서 있으면서 발표에 하나도 참석하지 못했다.

단지 시작할 때 잠시 들어가 보며 사진만 한 두장 찍었다.


발표 중에는 요즈음 발전을 거듭하는 듯한 iPad 용 TeX 컴파일 프로그램에 대한 리뷰도 있었고 대한수학회 김현선 선생님은 학회에서 저널 편집과 e-journal 운영등의 경험에서 사용된 TeX 관련사항에 대하여 발표했다. 발표의 숫자도 많고 했지만 발표 녹화는 없었다. 올해는 TeX 공부 안하고 시작하는 한 해가 되었다. 여름의 공주 워크숍에는 참석해야지.


시작할 때 참석한 사람들 사진을 올려둔다. 파노라마로 찍을줄 몰라서 그냥 두 장이다.




하루 전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유리 공예 전시를 잠시 보았다. 수천년 전부터 있었다고 하는 유리 공예품 가운데 매우 작은 것들 (돋보기를 쓰고야 보이는...)이 있어서 한 장 사진을 찍어봤다. 생각밖으로 잘 나온 듯하다. 자동 촛점인데 자그마한 돋보기 속으로도 제대로 맞추었다...




사진은 전부 OLYMPUS PEN Mini E-PM2로 찍었다. 세팅은 기본 세팅인 iAUTO이다. 

노출 시간은 자동으로 맞추어진 시간이 발표회장은 1/80초, 박물관은 1/20초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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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 유후인을 보다.

기타 2013. 1. 20. 12:37

며칠 전에 2박 3일로 일본 큐슈 북쪽 산 속의 마을 유후인(由布院)을 여행하였다. 온천 마을의 하나이고 조그만 산 속 마을이라 구경할 것이 많지는 않다. 오랜만의 가족 여행이지만 바쁜 와중이어서 계획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딸려갔다왔다. 우리 여정은 인천공항에서 후쿠오카(福岡)공항 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리는) 비행기로 가서 공항에서 국내선쪽으로 공항셔틀(무료)로 이동하고 거기서 유후인으로 가는 고속버스 (수준은 우리나라 시외버스 수준?)를 타고 1시간 40분 걸려서 유후인 역 앞의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묵는 여관에서 차를 보내주어서 잠깐만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후인이란 동네는 정말 작아서 중심지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걸어서 30분 정도에 불과하다. 빠른 걸음이면 20분이면 걷는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좁은 (차 두대 엇갈릴만한, 인도는 따로 없는) 길이 하나, 차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 두어개  평행하게 나 있다. 좁은 길 가에는 가지요지 가게들이 늘어서있다. 반 이상이 먹을것이고, 나머지는 souvenir 매점 등이다. 거기 가서 할 일은 먹는 것과 목욕, 그리고 이 가게들과 동네를 둘러보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 곳 근처의 갤러리/식당의 입구 복도 (GalaxyIIHD)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맛집으로 되어있는 한 집에 가서 국수를 먹었다. 그쪽은 산 위쪽으로 조금 언덕진 곳이어서 점심을 마치고 걸어내려오며 일본의 시골 풍경을 보았다. 여관에 들어와서 짐을 제대로 풀고 목욕을 하고(?) 아이들은 동네 구경을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목욕. 여관에서 저녁식사를 주는데 일본의 여관 식사는 처음이라 방에서 받아서 먹는 식사를 신기하게 경험했다. 가족들은 밤에 다시 큰 공중탕에서 목욕을 하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 공중탕에서 잠시 목욕을 하고 제공되는 아침 식사를 하고 동네 구경을 나갔다. 킨린코(金鱗湖)를 구경하고 사람이 바글거리는 먹자골목(?) 쪽으로 나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나가서 동네 절 龍峩山 佛山寺를 보았는데  역사가 천년 정도 되는 절이다. 바깥만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스테인드 글래스 박물관과 작은 교회 건물 등을 보고 점심을 먹었다. 이 동네 토종닭(지도리,地鷄)이라고 하는데 맛도 괜찮고, 음식 입맛은 여기서 보는 화려한 일식들과는 조금 다른 편안한 맛이다. 여관 음식도 조금 고급스럽지만 맛은 역시 조금 시골풍이랄까? 편안한 맛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점심후에 모든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걸으며 구경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은 옛날 풍 일본집 거의 그대로이다. 아마 각 별채의 입구만 손본 듯. 부분 부분은 우리가 어릴 때 살던 일본식 (오카베 집이라고 부르던) 집과 똑같다. 1920년 경에 세워졌다니 아마도 후에 보수를 대대적으로 했거나 중간에 새로 지었을지도 모른다. (1950-60년대쯤) 이 별채들에서 욕탕만은 조금 현대적으로 보인다. 탕은 위 테두리만을 나무로 두르고 안쪽은 큰 타일 내지는 돌로 되어 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은 다시 목욕을 했고 나는 방에서 발만 조금 담그고 있다가 잠을 잤다. 


다음 날은 아침 후에 후쿠오카로 떠나서 점심때쯤 도착하였고 점심 후에 백화점을 한 두 군데 둘러보고는 공항으로 갔다. 눈이 많이 와서 비행기가 조금 연발하였지만 별 무리 없이 인천에 도착하였다.



프론트 앞의 소파와 탁자 (GalaxyIIHD)


일본 여행이 두 번째지만 말로만 듣던 여관(료칸) 여행은 처음이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여관은 손님들이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된 경험을 위주로 한 것이지만... 본채에는 입구 (프론트의) 거실 외에 2층에도 아담한 거실이 있는데 서재를 겨하고 있다. 책상에는 오래된 만년필도 놓여 있는 등 싸구려는 아니다. 이 밖에 별채 사이에 반2층짜리 벽돌 건물을 두었는데 거기는 담화실(談話室)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큰 거실이다. 한쪽에는 꽤 많은 책들이 거의 2층까지 닿는 높은 서가에 꽂혀있고 (높아서 위쪽은 사다리로 올라가야 한다) 안쪽은 한 계단 낮게 소파가 둘러 있는 탁자와 한쪽 벽에 벽난로가 있다. 옛 일본식 베치카가 아니고 서구식 벽난로인데 불을 피워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방을 좋아했다. 이 방에는 오래된 골동품도 몇 가지 모아놓았는데. 우선은 1930년대 영국의 축음기가 있었다. SP 음반도 한 세트 갖추고 있었고 amplifier 없이 내 몸통만한 스피커로 나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그 방 안에서  충분히 크게 들렸다. 이 밖에도 오래된 탄노이 모노 스피커를 마란츠 앰프에 물려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벽난로 위에는 나무로 만든 퍼즐들이 몇 개 있었다. 


이집의 식당에서 젓가락을 싼 종이에 도장으로 찍힌 어구가 千里如面이라는 것인데 중국 어느 시에서 따 왔다고 serving하는 아가씨가 이야기했지만 무슨 시인지는 알 수 없고, 일본에서는 편지 봉투에 찍는 도장의 어구로 잘 쓰이는 것인지? 뜻은 대략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얼굴을 마주대한 듯이 마음이 통한다"라고 써 있는데가 있지만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여관으로서는 잊지 않고 다시 왔으면 한다는 의사표시를 꽤 운치있게 한 듯하다.


쉬러 간다는 뜻의 온천여행이지만 조금은 바쁘게 돌아다녔고, 온천은 괜찮은듯 하다. 단지 대중탕이 겨울이라 공기가 차가운 것은 어쩔 수 없는듯. 아마 노천탕은 더하겠지만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여서. 참 말만 듣던 족욕탕을 기차역에서 보았고, 먹자골목 한군데는 족욕탕 안에 작은 피라미들(?)을 잔뜩 넣어놓고 발의 각질을 뜯어먹게 하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 마디만 더 써둔다면 이 마을 뒤켠의 산(화산) 봉우리는 우뚝 솟아있고 산정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은 由布岳. 그리고 유후인(由布院)이란 이름은 아마도 예전에는 湯布院이었던듯. 아마 발음은 같아서 요즘은 간단히 쓰는 듯하다. 湯을 쓰는 것이 온천 동네 이름에 더 맞는지도. 동네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도시 전체를 관광지로 개발했다하고, 특별히 유곽을 없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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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토요일 낮에 후배 따님의 결혼식에 참석차 모교를 들렸다. 오랫만에 들리기도 했지만 들려도 수학과 건물에만 들렸다 돌아가곤 해서 캠퍼스를 돌아본지는 꽤 오래되었다. 결혼식이 있는 엔지니어 하우스는 학교 속 끝까지 들어가서 있는 건물이었다. 예전 같으면 우리가 공부하던 건물이 학교의 가장 안쪽 끝이었는데 이제 이것은 한 중간 쯤에 위치하는 건물이 되었으니 학교가 꽤 커졌다. 건물도 많이 늘어서 이런 많은 건물을 유지하려면 비용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식장에서 친구와 점심을 하고 그 친구 교수실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저녁때는 다른 행사에 잠시 참석하고 집에 왔다. 그 친구와 이야기를 하던 중에 버클리 대학의 수학과 교수이셨던 小林昭七(Kobayashi) 교수님의 타계 소식을 들었다. 지난 8월 말이었고 세수가 80이시라고 하셨다. 함자의 昭七은 쇼와(昭和) 7년 생이라는 뜻이었다고 이 친구가 알려주었다. 서기로 바꾸는 것은 쇼와에 25를 더하라고 했으니 32년 생이시니 올해 80이 맞다. 이 친구의 지도교수이셨고, 내가 국내에 들어와 자리잡고 몇 년 후에 한 번 한국에 오셨을 때 우리 학교에서 말씀도 해 주셔서 잘 기억하고 있다. 실제로 만나뵌 것은 이 때 한번 뿐이었지만 인상깊은 만남이었다.


워낙 유명한 수학자이고 그분이 만든 복소다양체 위의 계량(metric)은 복소기하학의 기본이 되어버렸으니 뭐라 더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그분의 이름을 따서 Kobayashi metric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분이 오셨을 때는 아직 활동이 활발하실 때였다. 오셔서 강연하셨던 내용은 오히려 기억에 없지만 강연이 끝나고 나의 교수실에서 말씀을 나누시면서 몇 가지 말씀을 하셨었다. 이 중에서 수학 공부에 대하여 오래된 내용이 오히려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선생님은 일본에서 3판까지 나온 이와나미 서점의 유명한 수학 사전도 자신은 1판을 옆에 놓고 항상 그것을 보신다고 하셨다. 1판은 꽤 오래된 것이라 새로운 수학 내용은 없고 정말 오래된 내용도 들어있는 그런 사전인데 나는 부친께서 가지고 계셨던거라 아직도 가지고 있다. 친구에게 들으니 이 분이 1980년 경에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유명한 수학자인 엘리 카르탕(Elie Cartan)의 논문 모음집을 다시 인쇄하였을 때 이것을 주문하면서 기뻐하셔서 자기도 한 부 같이 주문했다는 말을 했다. 이 책은 꽤 오래된 것이지만 이분 뿐만 아니라 내가 만나본 여러 사람들이 중요한 책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대학 도서관에는 거의 없는데 나는 최근에 이중의 일부를 낡은 중고책으로 구입하였다.


코바야시 선생님께서 공부하신 내용은 이 친구 뿐만 아니라, 나도 그리고 포항공대에 있는 나의 또 다른 동기 교수도 연구의 시작으로 삼고 있는 내용인데, 세월이 흘렀는가, 20세기 복소기하학 및 기하학적 함수론의 1세대가 퇴역하고 있다. 20세기 중 후반에 크게 발전하고 수학 연구의 중심에 있었던 이 이론은 20세기 말이 되면서 점차 연구 문제가 너무 어려워지면서 응용수학과 해석학 연구 중심으로 선회하는 수학계 속에서 조금은 옆으로 밀려난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코바야시 선생님은 자신이 공부하신 내용을 집대성하여 10여년 전에 Springer Verlag에서 Hyperbolic Complex Spaces라는 이름의 두꺼운 책으로 내어놓았다. 그의 생애 초반의 중요한 저작인 Holomorphic Mappings on Complex Manifolds인가 하는 책과 또 두 권의 대작 Foundations of Differential Geometry는 수학에서 이쪽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bible과 같은 책들이다. 이 밖에 Transformation Groups in Differential Geometry라는 조금은 덜 알려져 있는 책과 일본어로 된 교과서들로 몇 있다.


1960년경 당시 어렵다는 대수기하학에서 유명한 돌파구를 마련했다는 공으로 젊어서 Fields 상을 받아서 우리에게는 유명한 일본의 Hironaka(廣中) 교수님을 내가 학생시절에 뵈었을 때, Kobayashi 교수님을 가리켜서 2년만에 박사학위를 받고 대단한 업적을 내고 계시는 천재에 비유하시면서 수학 공부하는 데에서는 마음이 편안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셨던 말씀도 기억이 난다. 코바야시 교수님은 일견 깐깐해 보이는 외모와 태도이실 수 있지만 말씀을 나누어보면 사소한 일까지도 마음을 쓰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점이 쓸데 없는 일에 흔들리지 않으면서도 delicate한 수학에서 master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힘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8월달에는 또 다른 유명한 수학자 Bill Thurston도 타계했다. 현대 수학을 지금의 모양으로 만든 대표적이 수학자 중에 두 분이 타계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 버렸다. 코바야시 교수님께서 1990년대 초에 우리 학교에 오셨을 때 강연료는 정말 적었고 이 밖에 선물로 우리 학교 로고가 새겨진 넥타이를 선물로 드렸던 것이 기억에 있다. 뭔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셨겠지만 선물을 받으실 때는 좋아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수학적으로는 이런 분이 드무니 바라지 않지만, 적어도 인격면에서는 이런 분을 본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단 한번의 만남이었지만 이런 면에서 조금이라도 배운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갖는다.


Obituary of Professor Shoshichi Kobayashi


I had a chance to visit my old college last Saturday to attend the wedding ceremony of a daughter of my friend and colleague. It has been long since I have been to the place and even longer to look around the campus. The ceremony was held at the Engineering House which is located at the farthest inside the campus. In the 70's, our Math building was located the most inside among the buildings, but now it is in the middle of the campus. The campus is growing rapidly and it must be hard to maintain such a big complex.


I met another friend of mine, who is a professor in the university. We had lunch together and had a long chat in his office. Among what he told me was the obituary of Professor Kobayashi, a world renowned mathematician who used to be a professor at UC Berkeley. He passed away last August at the age of 80. His given name Shoshichi(昭七) has the meaning of 'born in the 7th year of Showa(昭和)'. The transformation rule of Showa is adding 25 and he must have been born on 1932, he is 80 alright. He used to be the thesis advisor of this friend of mine when he was in Berkeley. Thanks to that when he visited Korea in the early 90's(?) he came to my Korea University and gave a talk. I forgot what he talked about, and I am sure it is about the geometric methods in complex analysis or so. But I clearly remember that he came to my office and we three had a chat for an hour or so. Among the chat he mentioned about old mathematics. His idea is that old math is never to be thrown away but must be kept and reviewed over and over. He mentioned also that he still kept the 1st edition math encyclopedia of Iwanami Shoten. This edition is pretty old, is missing many new maths and contains some very old ones. I still keeps this old edition owned by my father. In the 80's, he was so very much excited to order the, then newly reprinted, Oeuvres of Elie Cartan, my friend said, and he (my friend) also had ordered them. This book is old fashioned but many people i have met mentioned it as a very important reference. It is very hard to find the copies of this book in Korea, and I recently purchased some parts of it as used books.


Professor Kobayashi's mathematical works became the starting point of not just my friend's research but also mine and that of another friend of ours in Postech. But already the 1st generation of complex geometry and geometric function theory of 20th century is retiring. This field of math had been in the center of math during the mid 20th century, but due to its difficulty in problems and due to the applied math trends, it looks like giving way to other fields. Some 10 years ago Professor Kobayashi collected the materials in this field into a huge book named 'Hyperbolic Complex Spaces,' which was published from Springer Verlag. He also wrote two other books, 'Holomorphic Mappings on Complex Manifolds' and 'Foundations of Differential Geometry (with Professor Nomizu)' in his early years, and these became a bible in our field. Another small book named 'Transformation Groups in Differential Geometry' is less known but it was very important to me. He also wrote several texts in Japanese.


When I met Professor Hironaka when I was a student, he mentioned about being able to be free from anxiety is the key in studying math, and mentioned Professor Kobayashi as a young genius finishing his PhD in 2 years and being very fruitful. Professor Kobayashi may look a bit hard to come close to at first sight but as I talked to him I found he is very caring in every ways. This seems to be his power which kept him from being easily-shaken and which made him a master in this delicate field of mathematics.


Last August another famous mathematician, Bill Thurston, passed away. They were two of the most important figures who shaped the modern mathematics in this form. When he spoke in Korea University, the honorarium was very small, and I added the university souvenir, a tie with a university emblem on it. It was nothing compared to his talk but he looked very pleased to receive it. It is my hope that I had learned a little bit of something, if not math, from him through this occa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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