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5일 오늘은 Fullbright로 초청된 사람들을 위한 Jazz 공연을 보러 오라고 해서 Washington DC의 중심가인 Dupont Circle 근처의 International House에 갔다. 어제 밤부터 눈이 쏟아져서 Snow storm이라고 하고 있었는데 아침에는 눈이 너무 많이 쌓여서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몇 번 전화를 걸어서 공연이 cancel되지 않았는가 확인했는데 그대로 한다고 해서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에 친구를 pickup해서 가야 해서 한 시간 전에 떠났는데 가다 보니 시간이 훨씬 더 걸리게 생겼다. 결국은 조금 늦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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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집에서 내다 보니 세상이 하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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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d Georgetown Rd를 따라서 안사람 후배 집에 가는데 가는 길에 차는 하나도 없고 눈만 보인다. 시속 20mile 정도로 천천히 갔다. 예전에 Michigan에서 언 길에서 운전했던 경험으로, 길이 미끄러운 날 시속 5마일로 가다가 break를 밟아도 속도도 줄지 않고 핸들을 돌려도 차는 그대로 직진해서 30m 쯤 떨어진 rotary를 smooth하게 받아본 경험이 있어서 다른 사람들 보다도 더 조심조심 운전했다. 꽤 미끄럽기는 하지만 차에 ABS인가가 있어서 Break pumping을 하지 않아도 스스로 그렇게 해 주고 차도 돌지 않는다. 20년 전에 Michigan에서는 그런 것 없는 8기통 큰 차를 몰았었다.

도착해 보니 이미 음악회는 시작되어 있었고 조심조심 들어가서 뒷자리에 앉았다. UCLA에서 공부하던 시절에 학교 union의 coffee 집에서 한 번 본 것 말고는 Jazz라고는 본 적이 없는데 Howard 대학의 교수들과 학생들이 나와서 연주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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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로 익숙지 않아서 그냥 듣고 있었는데 중간 쯤의 한 곡은 그런대로 괜찮았다. 제목은 뭐라고 하는지 알아 들을 수도 없어서 포기하고... 또 나오는 곡을 녹음해 보았다. 음악은 중간쯤으로 평가한다. 녹음을 디카를 들고 했어서 음질은 형편없다. 재생이나 제대로 되려는지 알 수없다.


끝나고 준비된 refreshment를 먹었다. 과자, fresh salad, cheese와 wine이 다 였다. 그래도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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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사진을 모두 어두운데서 flash 없이 찍어서 흔들려 제대로 나온 것이 별로 없다. 시간이 나면 몇 장 더 올려 두기로 하자.

끝나고 나오니 이 건물 바로 맞은편이 옛날 안사람이 박사공부할 때 혼자 와서 살던 옛날 집이다.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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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초기의 집인 듯 하고, 안사람이 묵던 꼭대기 다락방은 노예들이 살던 방으로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 아주 좁은 계단으로 다른 계단과 따로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외부인에게 임대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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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정하고 나니 생활도구가 많이 필요하다. 전세기 79년에 친구 도움으로 하룻밤만에 가재도구를 마련했던 것은 LA에서였는데, 이제 다시 하려니까 시간이 보통 드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전반적으로 격상된 생활수준에 간단히 물건을 장만할 수도 없다. 나만의 기호로 결정할 수도 없고, 가격 또한 그렇다. 이리 저리 해서 다시 주말을 보냈다. 그 동안 워싱턴 지역은 정말 추웠다. 영하 13도씩 내려간 날도 며칠 있었고, 매일 최저기온이 대충 영하 10도 안팎을 넘나드는 날씨였다. 그런 날씨에도 매일 아침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간신히 연결한 네트웍으로 워싱턴의 인터넷 장터인 Craigs List를 뒤져보다가 싸구려 audio system을 장만하였다. 아마도 10~15년쯤 된 것일텐데 친구가 두고 간 것을 정리한다고 $65 정도에 샀다. Kenwood 리시버에는 Kenwood two way speaker가 딸려 있다. 조금 험하게 써서 그리드 천의 모서리가 헤어졌지만 소리는 그런대로 난다. 좋은 brand가 아니어서 아쉽지만 그냥 듣기로 했다. CD player는 Sony의 5 CD changer이다. 이것은 써 보지 않아서 알 수가 없다. CD player는 wear out 하는 것이니까 별 기대는 안 했지만 아직 돌아가는 것 같다. 조금 아까 첫째 CD인 Andrea Bocelli를 끌내고 지금은 Beatles를 play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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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랫만에 UMD(메릴랜드 대학)에 갔다. 안사람은 자기 학과에서 들을 것이 몇 개 있어서 점심때 쯤 도착하였다. 우리 학과에서는 아직 아무 것도 준비 되지 않았을 것이어서 그냥 도서관에나 한 번 가 보자 했었는데, 가는 길에 학과 게시판을 한 번 보니 이번 주 월요일에 Minicozzi가 왔었네... 물론 그 때는 인터넷이 없어서 알 수가 없었지만 아깝다. 뭐 알아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했었겠지만, 그래도 여기서도 들어볼만한 이야기를 하는 talk가 그리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니까. 그리고 보니 매 주 월요일 Geometry Seminar가 있다. 그리고 4월 말에는 근처 대학들의 geometer들의 모임인 Geometry Festival이 있다. 그때까지 여기 있어야하나? 고민되는군. 여기 왔는데 이것을 놓치면 별로 하는 것도 없지만 계획을 거의 한달 가까이 연장하는 것도 괜찮은지 알 수 없다.

Geometry Festival과는 인연이 있는 것인가? 15년 전에 여기 왔을 때는 Grove 교수님을 따라서 이곳 대학원생들이랑 그리고 방문중이었던 러시아의 Burago 할아버지랑 같이 UPenn에 가서 Geometry  Festival에 참석했었다. 무엇을 들었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리고 97년인가에 고성은, 임진환 교수와 함께 Geometry Festival을 보겠다고 뉴욕을 거쳐서 또 다시 UPenn에 갔었다. 한번은 I House에 묵었었고 또 한번은  학교 호텔에 묵었었다. 아침은 Geometry Festival에서 주는 푸짐한 빵과 드링크로 배불리 먹었던 것 같다. 두 번째 갔을 때는 Chern 교수님이 왔었던 것 같은데...첫 번째였나? 아직 살아계실 때였고 Finsler Geometry에 대해서 발표하셨는데 연로하셔서 목소리는 떨렸어도 80년대 초에 LA에서 뵈었을 때와 비슷하게 정력적이라고 보였었다. 분명히 두 번째에서 Alice Chang 교수님을 뵈었고 Lin Kai Ching의 근황을 물어봤었다. 알라배마대학에 있었는가 했고 한 번 연락했었는데 또 연락을 끊고 살고 있다. 당시 유행하던 symplectic geometry에 Hopfer가 와서 발표했던 기억도 있다. 어쨌든 공부가 힘들다는 생각을 우리 셋 모두 했던 것 같다. 여기서 하는 것을 따라가기가 정말 어렵다는 것을 느꼈던 때이다.

오후가 되어서 점심먹고 안사람이랑 헤어져서 도서관 두 군데를 들려서 저녁 5시에 태극권을 한다는 St. Mary's Hall의 지하 Multipurpose room이란 곳에 갔다. St. Mary's Hall은 Language House가 운영하는 기숙사로서 외국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학생들이 들어와서 그 나라 말로 생활하는 immersion language course와 자기 공부를 모두 하겠다는 학생들의 숙소이다. 들어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 지하의 넓은 방에서 10여명의 학생들이 모여서 태극권을 배우고 있었다. 나도 참석하겠다고 메일을 보냈고, 선생님은 중국인 여자선생님이었는데 태극권을 여러군데서 가르친다고 한다. 여기서 공부하고 있는 것은 양가 간화태극권이라고 부르는 short form이다. 금요일에는 4시에 진가를 가르친다고 하니 한 번 가 봐야겠다. 이 여자선생님은 무술로 공부한 것 같고 설렁설렁 이야기하며 가르치지만 제대로 공부한 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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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동안 몸풀기와 앞부분 동작, 그리고 마지막 5분은 몸 정리 운동으로 끝냈다. 젊은 학생들이라서 설렁설렁하는 것은 아니지만 또 강도높은 훈련도 아니다. 여기에 참여하는 나이든 남녀가 한 분씩 있다. 아마 학교의 교수거나 staff 인 것 같다. 4월달의 Maryland Day에 태극권 시연을 할 예정이라고 했다. 얼마나 배워서 할 지 궁금하다. Geometry Festival 때문에 4월에 여기 있게 되면 이것도 구경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은 공식적으로 들고 찍기는 뭣해서 table에 놓은채로 보지 않고 셔터를 눌렀더니 제대로 나온 사진이 없다. 그냥 어떤 모임인지 단편적인 느낌만 준다.

낮에 점심먹으려고 안사람을 기다리며 Student Union Bldg에서 소파에 앉아 있는 동안에 주변을 둘러보니 바로 옆의 소파에서 자고 있는 학생이 두 명이 있다. 심심해서 사진을 찍었는데 초상권 침해라고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만 올려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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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라 둘 다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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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은 서로 마주보는 소파에서 자고 있었다. 어쩐지 첨밀밀의 두 사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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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년차 도미하여 미국 메릴랜드 주에 안착하였다.
예전에 한 번 와 봤던 곳이라서 낯 설지는 않지만 지난 15년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또 전혀 바뀌지 않은 것도 많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처럼 자주 바뀌는 것을 안 좋아했었지만 조금은 변했으면 하는 것들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며 마구 바뀌는 것이라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본다.

처음에 와서 묵은 곳은 알지는 못하지만 어떠어떠한 관계로 연결이 되어 알게 된 사람의 집이다. 집은 Washington DC의 Georgetown의 정말 작은 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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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보이는 대로 지상 2층 지하 1층이고 지하층으로 통하는 계단이 집 안에 있지만 집 밖에서 지하로 들어가는 현관문이 따로 있다. 여기서는 이것을 보통 English basement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예전에 하인들이 살던 section이라고 생각된다. 집은 전면에서 보면 아주 좁고 방 하나 폭인데 안쪽으로 좀 길게 만들어져 있다. 앞쪽에는 거실 겸 식당이 있고 그 안쪽으로 부엌이 그 다음에 계속해서 family room 정도가 늘어서 있다. 2층에는 앞 뒤로 방이 두 개 있는데 아마 세개 이던 것을 앞쪽 두 개를 튼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지하는 많이 개조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앞 뒤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앞쪽은 작업실, 뒤쪽은 다용도실로 쓰고 있다.

이상한 것은 문의 폭이 별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150년 정도 된 동네니까 그 당시 여자들은 폭이 넓은 치마를 입었을 것 같은데 이 문으로 드나들기가 어렵지 않았을까 하고 물어봤더니, 당시 Thomas Jefferson이 매우 efficient한 사람이어서 쓸모 없는 공간 없이 꼭 필요한 디자인으로 집을 설계했으며 이 집도 이러한 경향을 따라 지은 집이어서 집이 매우 작고 좁다고 한다. 참고로 입구는 다음 사진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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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 집들은 모두 다 모양이 거의 같다. 당시 Georgetown이 미국 초기의 Elite라는 사람들이 집을 떠나서 일을 위해서 한 동네에 모이기 위한 town이었다고 하며 남자 혼자서 와서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많이 쓰였는지도 모르겠다. 집 앞의 도로는 옛날의 전차길이 남아있고 길은 화강암 종류의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자동차가 다니기에 불편하다. 이런 길은 거의 남아있지 않고 이 집 앞 길만이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 같다.

이 집에서 10일 가까이 지내고 Maryland쪽에 아파트를 구해 이사를 나갔다. 이 집에 있는 동안에 이집에 사는 고양이들 하고 같이 지냈다. 세 마리 고양이가 있었는데 한마리는 붙임성이 아주 좋고, 나머지 두 마리는 멀리서 보거나 숨어있었다. 붙임성 좋은 놈은 이름이 Galadriel이고 나머지 두 놈은 Morpheus와 무슨ped라고 했었는데 잊었다.(이제 알아냈다. 이놈 이름은 Intreped라고 한다.) Galadriel은 다음 사진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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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pheus는 껌정고양이인데 숨어서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사진도 못찍어줬다. 이름을 잊어버렸던 또 한 놈(Intreped)은 다음 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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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놈은 이 이상 가까이 오지 않는다.

어쨌든 이 집에서 오랫동안 폐를 끼치고 나왔다. 좋은 사람들이어서 몇 번 같이 앉아서 이야기는 했지만 시차 때문에 같이 앉아 있는 시간이 별로 많지 않았다.

그 동안에 바로 옆에 있는 Georgetown 대학에 한 두번 가 봤다. 운이 좋게 학교 행사가 있어서 저녁을 한번 공짜로 먹었다. 피자였지만... 오랫만에 Georgetown 대학 도서관에도 잠시 들어가 보았었다. 문을 지키고 있는 여직원이 15년 전에도 거기 있던 사람이었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우리 안사람은 잘 알고 있었다.) 옛날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하니까 큰 소리로 웃었다. 아마 이곳은 자주 오지 않게 될 것 같다.
여기 있는 동안 이 동네에서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아침은 간단히 집에서 먹으면 되었지만 남의 집에서 요리를 할 수도 없고 해서 동네 식당들을 돌아보았는데 이지 가까운 곳의 수퍼마켓에 Dean & Deluca라는 곳이 있었다. 이 마켓의 한 가운데는 음식을 만들어서 파는 곳이었는데 값도 reasonable하고 맛있으며 또 건강식이 많았다. 아침이나 점심을 여기서 사가는 사람이 많았다. 바로 옆집은 쇼핑몰이었는데, 이 몰 지하에도 food corner가 있어서 백화점 food corner처럼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 있는 동안 이 곳을 애용했다. 동네를 알아보고 집을 알아보고 하느라고 여러 군데를 돌아다녀서 집 근처에서 점심을 먹은 적은 별로 없었다. Georgetown 동네의 사진은 흐린 날 찍었지만 하나 올려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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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에 따라서 내 컴의 Firefox는 블로그의 본문 내용이 사라진다. IE에서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스킨의 버그인가? 내컴의 버그인가? 아님 티스토리의 버그인가?

어쩌면 이 스킨만의 버그인지도...

고수님들의 도움이 필요한 듯...

Firefox에서는 이렇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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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에서는 이렇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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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권 (1)

太極拳 2007. 1. 23.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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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감천 노사

태극권이란 중국 영현이라는 곳의 陳씨 집에서 전해내려오는 무술로서 다른 무술과 달리 부드러움을 추구하는 무술로서 청나라 말기에 그 우수성이 입증되면서 중국 전체에 알려진 무술이다. 그 역사와 뒷이야기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태극권이 만들어진 배경을 소설로 쓴 김용의 영웅문 3부작의 세 번째인 의천도룡기는 매우 유명하며 여러번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졌고 또 다른 버젼인 태극권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져서 태극권 동작의 일부를 영화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이 밖에 견자단이 보여주는 태극권 동작도 있고 해서 영화를 통하여 이 무술의 여러 형태를 이미 많이 접해 보았다.

태극권의 특징은 그 동작(형,투로) 자체에 있지 않다. 태극권 투로의 많은 부분은 다른 무술에도 그대로 있는 경우가 많으며, 조금 다른 경우도 약간의 변형일 뿐 이러한 변형은 무술들 사이에 많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왜 태극권이 특별한 것인가? 태극권은 이 똑같은 동작을 사용하는 방법을 조금 다르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을 개발했다는 점이 다른 무술과 다르다. 보통 우리가 아는 무술이 몸의 근골을 강화시키고 동작의 크기를 크게 해서 파워를 올린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다음 한 마디로 크게 잘못되기 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 몸의 모든 근육은 수축시키는 힘만 낼 뿐, 늘어나면서는 힘을 낼 수 없다.
예를 들어 주먹을 내지르는 순간에 팔의 근육들은 힘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주먹의 힘은 약해진다. 이것은 당연하다. 힘이 들어가면 주먹을 뒤로 잡아다니게 되니까 주먹이 나가는 속도가 줄어들게 된다. 힘은 주먹에만 주면 된다. 권투에서 주먹을 낼 때 어깨의 힘의 빼라던가 가볍게 치라고 하는 것도 주먹의 힘을 가장 강하게 하기 위한 방법을 이르는 말이다. 모든 무술이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근육을 강화시키는 훈련을 하다 보면 이와 반대되는 쪽으로 이끌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 그래서 고수가 되는 과정에서 이를 벗어나는 것이 힘들고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다. 태극권은 처음부터 이것에 중점을 두고 가르친다는 점이 다른 무술과 다르다. 이러한 무술을 내가권內家拳이라고 부르고 태극권 외에 형의권과 같은 것이 이에 속한다. 내가권의 특징은 근력은 기르는데 주력하지 않고 몸의 움직임을 이해하는데 올인한다. 특히 힘이 약한 사람이 힘이 센 사람을 이기는 방법으로 가르치기도 하고 조금의 힘으로 큰 힘을 제압하는 방법이라고 하기도 한다.

태극권이 유명해진 것은 청나라 말기에 궁중에서 황족의 무술을 가르치게 된 양로선이라는 사람이 당시의 모든 무술을 누르고 중국 무술계를 평정하다시피 하면서 알려지게 되었다. 양로선은 어렸을 때 진씨집에서 진가태극권을 익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후 양로선노사의 아들들을 거치면서 더욱 부드럽게 변형된 양가태극권이 건강(양생)을 위한 좋은 운동으로 보급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이와 함께 진씨집에서 배출한 진발과노사가 19세기 말에 무술계에 큰 명성을 날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알려진 태극권은 여러 사람에게 전해지고 연구되었으며 이를 연구한 여러 사람들에 의해서 변형된 몇 가지 태극권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에서 크게 보급된 정가태극권, 무우양이 개발한 무가, 오감천에 의한(?) 오가, 손록당에의한 손가 등등이 그것이다. 현재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양가와 그의 변형인 정가 및 오가이다. 최근에 태극권 붐을 타고 그 원전인 진가태극권이 여러 경로를 통하여 알려지고 있다.

진가태극권도 많은 사람들을 통하여 퍼졌다. 중국 본토에서 가장 많은 진가태극권은 진발과노사가 말년에 변형시킨 것으로 대륙식이라고 불린다. 이에 비하여 진발과노사가 젊은 시절에 전수된 초기 형태가 있다. 대륙식은 대표적으로 진씨 집안의 사람들에 의하여 전 세계에 퍼졌으며, 풍지강 노사와 같은 분도 대표적인 분이다. 영화에서는 이연걸을 통하여 진가 대륙식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진발과 노사의 초기 진가태극권은 중국에서도 그리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에는 적전으로 전해지고 있다. 밝은빛 태극권은 초기 진발과 노사의 진가태극권을 전하고 있으며 진가태극권의 21대(?) 적전 제자 되는 분이 관장이며 매우 열심히 태극권을 전하고 있다.

나는 직장에서 동료 선후배들과 함께 우연찮은 인연으로 진가태극권을 접하게 되었으며 간단히 진가 태극권 노가 1로와 양가태극권 노가식을 공부하였다. 권법으로 공부하지는 않았으되 그 동작의 오의를 생각하게끔 배웠다. 공부하는 동안 태극권 공부가 내가 공부하는 학문의 공부와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태극권에 재미를 붙였었다. 열심히 수련을 해야 하지만 게으름으로 인하여 별로 자주 하지 못한다. 가르쳐 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같이 하기도 하지만 이도 드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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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원 공간의 곡면을 공부하여 보면 많은 아름다운 성질들이 보인다. 이 성질들 가운데 또 많은 부분은 바로 눈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라서 문외한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들이다.

(곡면이) 아름답다는 것은 규칙과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감지해낼 수 있는 규칙들은, 꼭 그 규칙을 말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어도, 그 규칙을 가지는 대상을 분류해 내고 공통성을 느낄 수 있으며 아름답다는 말로 대신하는 것 같다. 곡면 가운데 아름다움을 주는 규칙 가운데 하나는 그 곡면의 넓이와 상관이 있다. 곡면을 가만히 놓고 그 곡면의 일부분을 조금 바꾸어 보았을 때 넓이가 더이상 줄어들 수 없는 곡면을 극소곡면(minimal surface)라고 부른다. 극소곡면의 이론은 18세기에 미분기하학이 시작되면서 같이 발전한 이론이다.

이러한 곡면 가운데 (평면을 제외하고) 가장 단순한 곡면이라면 현수면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극소곡면중에서 가장 먼저 발견된 것이고 그 모양이 곡선을 회전시켜서 만든 회전면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곡면의 모선(母線,generator)을 이루는 곡선은 현수선이라고 하여, 줄넘기 줄처럼 밧줄의 양쪽 끝을 두 사람이 잡고 늘어뜨리면 그 밧줄이 이루는 모양의 곡선이다. 이 곡면의 모양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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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소곡면은 철사줄에 매달린 비누막으로 잘 나타난다. 비누막은 표면장력때문에 극소곡면의 형태를 띄게 된다. 실제로 실험해서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사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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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의 두 파란 링을 조금 더 벌리면 비누막은 가운데가 조금 더 가늘어지면서 위의 그림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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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의 추억?

교육 2007. 1. 22. 17:43

집안을 정리하다가 책 틈에서 언젠가 신문에서 오려 놓은 글이 하나 나왔다. 김형기논설위원이라는 분이 쓴 글로 제목은 본고사의 추억이다.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며 항상 하는 생각을 다시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대학에 들어갔고, 아이들이 입시에 휘둘리는 동안은 우리나라 교육을 완전히 개편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던 것이 대학 들어가는 순간부터 먼 딴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아이 엄마 말이 꼭 맞다. 신문의 글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지금의 학부모 세대가 입시를 겪은 1970, 80년대의 입시는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자식세대는 수능+내신 세대이고 스스로 죽음의 트라이앵글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신-수능-논술의 삼각파도에 휘말려 있다고 쓰고 있다.
그 뒤에 쓰여 있는 글을 직접 옮기면
(상략)
그때에는 학원과외나 개인과외를 아무리 해봐야 본고사 성적을 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수학 같은 과목은 100점 만점에 20~30점만 맞아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 객관식 문제의 답을 집어내는 요령만 반복 숙달시키는 학원과외로는 그런 수준의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됐다. 부모가 제아무리 부자라도 자식의 실력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본고사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학력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방어막이었고, 재능 있는 가난한 학생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사다리였다.
(하략)
이것은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의 경제력은 자녀의 공부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에 있다. 본고사 시절에는 무작정 과외를 많이하는 것은 점수가 올라가는 것과 상관관계가 적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그 상관관계가 매우 크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교육효과이다. 본고사 시절에 수학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학원/과외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과외의 목표는 수학 내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수학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대부분 내용의 이해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특히 내용의 이해에 방해되는 식으로 문제푸는 요령을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육적으로 매우 퇴보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 더 낫다고 교육부가 주장하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한 자식의 학력의 불공정은 어떠한가? 위의 글에서는 예전의 본고사의 경우에 경제력이 별로 영향을 미치치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요즈음의 쉬운 수능문제와 4~5지선다형 문제에서는, 얼마나 빨리 문제를 푸는가, 그리고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는가가 시험점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이는 학원에서 어떠한 훈련을 시키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학원 선생님들은 어떤 훈련이 점수를 높이는가를 정말 잘 알고 있다.)

문제가 되는 사실은 시험문제가 쉬워지면 시험을 잘 보는 학생과 못 보는 학생의 점수차는 많이 줄어들지만, 정작 원하는 효과인 경제력에 의한 순서를 뒤집을 가능성은 매우 줄어든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를 빨리 푸는 것은 마치 100m 달리기 연습을 하듯이 얼마나 훌륭한 코치가 가르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즉, 얼마나 돈을 쓰는가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쉬운문제를 푸는데 학생들의 능력차이는 별로 많지 않다. 따라서 달리기와 같은 기본적인 체력차이 같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점수 차만 줄여서 평등해진 것 같이 보이게 할 뿐, 실제로 등수를 뒤바꿀 방법은 없으니까 불평등이 가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온것이 학생들의 점수차를 뭉뚱그려서 등급의 수를 줄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시험본 결과에서 학생들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없애고 대학에서 전형자료로 쓸 수 없게 하겠다면, 시험은 뭣하러 보는가? 아예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이 학생들의 정서와 체력에 훨씬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러한 내용을 교육부의 관료들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잘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라면 적어도 모 사립대학의 입시 문제 파동(본인의 후배 교수의 석궁 사건)과는 비교가 안되는 큰 문제라는 것을 모를까? 당연히 바른 말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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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이 아빠의 글을 읽고서 처음으로 한글 간소화 파동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래 된 이야기이고 탁상공론 쯤 되는 정책이 발표되고 철회되는 것은 너무 많이 보아왔으므로 일견 별로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내용을 읽어보며 조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외할머님은 19세기 말에 태어나신 분으로 일기를 비롯한 글을 많이 쓰셨다. 나는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으므로 어렸을 적에 글 쓰시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랐는데,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외할머니는 철자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셨으므로 글을 쓰셨지만 아주 옛날 식으로 쓰신다고만 생각했고, 내 생각에 철자법이 없던 시절에 발음대로 쓰시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도은아빠의 글에 있는 옛날 철자법을 읽어보니 할머니가 쓰시던 것이 그 철자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구한말에 쓰던 한글 철자법이 제대로 된 것이 있었던가, 아니더라도 공통되는 쓰는 규칙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마도 당연한 이 사실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그 글에 댓글을 쓰고 거기에 또 답을 받고 생각해보니 그 댓글에 썼던 '고난이도'라는 말은 발음이 틀리는 말은 아니었다.(조금 문맥에 맞지 않는 예가 되었다.) 이 예를 들었던 것은 요즈음에 여러 곳(방송, 신문 등)에서 이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내가 학생시절에 선생님들을 통해서 많이 들었던 이 뜻의 말은 항상 고난도였지 고난이도라고 하셨던 분은 한 분도 없었다. 그래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어색한 느낌이 들어 왜 이런 말이 쓰이게 되었을까에 생각이 갔던 기억이 난다. (비록 고이도라는 말은 잘 안 쓰지만, 잘 쓰이는 난이도는 쉽고 어려운 정도라는 뜻이리라 생각한다.) 아마 사람들은 난이도에서 높은 쪽은 난도쪽이라고 당연히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학을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난도와 이도는 방향만 바꾸면 정 반대로 늘어놓을 수 있는 동등한 두 방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난이도에서 높은 쪽이 난도쪽이라는 생각에는 조금 거부감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쓰이는 것은 아마도 한자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한자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큰 논쟁거리지만, 그리고 나는 이 문제에서 딱히 어느쪽이 더 좋은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내 경험으로는 단어의 구조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 많은 단어를 그대로 외워야 하고, 이것은 더 복잡한 단어에서 뜻을 밝히기가 힘들어지는, 그래서 뜻이 모호해지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서구의 언어에서도 latin이나 greek의 어원을 찾으며 자신들의 말을 사용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의 언어학은 기존의 언어와 다른 변형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사회)의 언어도 또 하나의 언어로서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의 흑인영어는 이러한 대표적인 것으로 이것도 제대로 된 영어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집단이 변형된 언어를 공통언어로 사용한다면 이 또한 분명히 rule을 가지는 언어임에는 틀렴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변형이 말 그대로 rule의 변형이 아니라 rule이 없어지는 것이어서 그 변형된 rule의 모음(집합,set)이 원래 rule의 모음의 일부분(subset)이라면 이것은 새로운 언어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것은 단순히 그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같은 문장의 띄어쓰기가 여러 가지 변형을 가지면서 몇 가지 rule을 따르는 것은 한 가지 rule만을 강제하는 것 보다 더 다양한 rule을 가진 더 복잡한 언어로 변형된 것이지만 (발전은 아닐 것이다), 한 단어의 부분 부분을 나누어 생각해 보지 않고 단어를 만들어 쓰는 것은 일견 여러 표현이 생겨 말이 풍부해지는 듯이 보이지만, 문법 규칙이 없어지는 쪽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말이 규칙을 잃어버리면서 퇴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의 퇴보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진화의 과정에서 말의 퇴화현상일지 모르고, 이를 통해서 우리말 사용에 유창fluent하기보다는  우리 말에 조금 덜 유창한 대신 동시에 여러 나라 말에 유창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모두 알고 정책을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유행하면 비록 틀려보여도 그냥 두어볼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rule에 잘 맞는 유창한 한국어가 보기 힘들어지고, 언젠가는 우리 말에서 maximal set of rules를 활용하는 사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우이더라도 그와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우울한 느낌이 있다.

다시 돌아가서 이승만대통령의 아이디어는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아직도 이 문제에서 변화와 유지라는 두 방향가운데 어느쪽이 옳은지는 확실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승만대통령의 잘못이라면 이것만이 옳다고 고정시키려는 것일 것이다. 어째서 옳은지 득실을 따지고 이에서 장기적으로도 최대한을 얻을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에서 이승만대통령이 하려고 했던 것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처럼 어쩌면 현재의 맞춤법만으로 고정시킨 것때문에 우리 할머니 세대가 생각하고 사용하던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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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에서 공부할 때 같은 기숙사에 유학온 중국 친구의 LP에서 복사한 테이프에서 가장 좋아했던 노래입니다. 뜻도 모르면서 가사를 외워서 불렀던 곡이 이 소촌지연입니다. 이 테이프를 듣고 등려군을 좋아하게 되었구요. 별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곡 같아서 올려 둡니다. 가사의 번역은 오래 전에 웹에서 찾았던 것인데 금방 기억나지 않는군요. (사진은 이 곡이 든 앨범의 쟈켓은 아닙니다. 그냥 웹에서 찾은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다음 쟈켓이 원래 LP 쟈켓인가봅니다.

노래는 이제 지워둡니다.

彎彎的小河

靑靑的山岡

依偎著小村莊

藍藍的天空

陣陣的花香

怎不叫人爲你向往

啊 問故鄕

問故鄕別來是否無恙?

我時常時常地想念你

我願意 我願意回到你身旁

回到你身旁

美麗的村莊

美麗的風光

你常出現我的夢鄕

難忘的小河

難忘的山岡

難忘的小村莊

在那裏歌唱

在那裏成長

怎不叫人爲你向往

啊 問故鄕

問故鄕別來是否無恙?

我時常時常地想念你

我願意 我願意回到你身旁

回到你身旁

美麗的村莊

美麗的風光

你常出現我的夢鄕


꼬불꼬불한 개울, 푸르른 산언덕을 돌아 작은 마을에 닿지요.

푸르른 하늘, 가끔 풍겨오는 꽃향기, 어찌 사람들이 너(고향)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아- 고향에게 물어봐요. 고향아, 그동안 아무 일 없었느냐?

나는 이따금씩 네(고향)가 그리워. 나는 원하죠. 네(고향) 곁으로 가기를.

네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풍경.

넌 내 꿈속까지 나타나는구나. 못잊을 개울, 못잊을 산언덕, 못잊을 작은 마을..

거기서 노래하고, 거기서 자라나 어찌 내가 너를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으랴..

아- 고향에게 물어봐요. 고향아, 그동안 아무 일 없었느냐?

나는 이따금씩 네가 그리워. 나는 원하죠. 네 곁으로 가기를.

네 곁으로 돌아가고 싶어. 아름다운 마을, 아름다운 풍경.

넌 내 꿈속까지 나타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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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1999년도 수학사랑 마지막 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수학사랑에는 이 글을 조금 줄여 편집된 내용으로 실렸습니다.)

19991015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수학을 좋아한다. 수학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수학은 무한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수학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행복이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그리 행복한 것 같지 않다. 열악한 환경에서 힘든 공부를 마치고 보면, 자신이 공부한 것을 쓸 곳을 찾기 힘들고, 운이 좋은 경우에도 주위의 무지와 잘못된 정책과 엎치락뒤치락하다 보면, 내가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 것인가 라고 생각할 때가 자주 있다. 선진국의 훌륭한 예를 많이 보면서, 또 우리와 비슷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거나 우리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나라들도 잘 해나가는 것을 보면서 우리만 잘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은 이런 생각을 할 때마다 전쟁후 살기 힘들던 때를 생각하며 나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믿고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새 천년을 눈앞에 둔 지금은 우리가 태어난 5, 60년대와는 다르다. 또 우리가 공부하던 7, 80년대와도 다르다. 지금은 잘못을 고치고 새롭게 준비하지 않으면 안될 때이다.

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모두 다 알고 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경험하는 왜곡된 교육현실과 근시안적인 대학교육 정책, 늘어나는 기초과학 경시풍조는 모두 수학을,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우리는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별다른 뾰족한 수를 대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문제를 바로 바라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는 생각해보려고 한다.

==== 수학은 어떤 학문인가 ====

수학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어떤 유명한 수학자가 최근에 "진정 수학은 무엇인가?" 라는 책을 썼다. 책 한 권이 필요하다면 분명히 어려운 물음이다. 우리는 이 물음을 음미해 보면서 수학이 보여주는 여러 양상을 보려고 한다. 수학을 가르치면서 보면 공부하는 학생들 대부분은 공식을 배우고 기억하려고 할 뿐, 그 유도 과정이나 이론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처음에는 이런 것을 보고 열심히 이론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그러나 차츰 수학을 왜 배우는가, 수학은 무엇하자는 것인가를 묻게되면, 생각나는 것은 우리도 처음 수학을 배울 때는 공식을 익히고 사용하는 것부터 배웠다는 것이다. 물론 이론도 배우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이론의 쓸모는 잘 몰랐다. 그 중요성을 느끼게 된 것은 꽤 나중의 일인 것 같이 생각된다.

공식 때문에 수학을 다시 바라보고 역설적으로 알아낸 것은 수학은 공식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단지 중·고등학교 수학에만 공식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론을 만든다는 것은 우리가 접하는 현상에서 공통적인 형식을 뽑아서 공식처럼 만드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수학은 결국 현상의 틀을 공식화하여 기억하기 쉽고 적용하기 쉽게 하자는 것일 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공식을 외우겠다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수학 이론을 배우고 공식을 익힐 때쯤 되면 그냥 무작정 외우는 것보다는 이론과 공식을 유기적으로 기억하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공부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더욱이, 유기적 관계를 이해하면 공부한 것을 훨씬 더 폭넓게 적용할 수 있게 된다. 이 수준이 되면 유기적 관계라는 공식이 탄생하는 것이다. 이 것을 보통은 외우지 않고 이해한다고 말한다.

==== 수학을 쓰는 단계 ====

수학을 공부하며 보면 수학에 단계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에는 정말로 단순한 공식을 기억하고 쓴다. 그러나 단계가 올라가면 하나의 공식은 이전 단계의 여러 공식을 유기적으로 모아서 한꺼번에 서술한 것처럼 보인다. 이 것은 그 다음 단계에서도 또 마찬가지이다. 처음의 한 두 단계는 모든 사람들이 중·고등학교까지 공부하며 경험하여 알고 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이러한 단계가 있으며 대학에서의 수학 교육은 이에 맞추어 새로운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것까지는 일반 사람들이 대부분 잘 모르고 있다.

한 사람을 교육할 때에는 교육의 목표를 정하여야 한다. 이 사람을 어떤 사람이 되도록 교육할 것인가? 초등학교나 중학교의 수학정도를 사용하는 일상적 업무를 다룰 사람인가? 고등학교나 대학 초반의 수학 정도까지를 쓸 수 있어야 하는 기능화된 단순수치작업으로 만족할 사람인가? 아니면 대학에서 공부하는 여러 가지 수학적 모형을 이해하고 다루며 스스로 모형을 바꾸고 창의적인 방법을 개발할 사람인가? 또는 수학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그 가운데에도 한 두 분야에 정통한 수학의 연구자를 만들 것인가에 따라서 우리가 수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방법과 자세가 달라져야 한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서 전문적인 수학자나, 다양한 모형을 다루는 능력을 가진 응용수학자 및 준 수학자들의 필요성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매스컴 등 여러 곳에서 들어 익히 알 수 있지만, 금융 분야나 정보 보안 분야와 같이 최근에 갑자기 중요하게 된 분야나 영상 분야나 정보 자료분야와 같이 꾸준히 연구되던 분야에서 근래에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대학에서 그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수학의 기법을 쓸 수 있고 또 개발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어떤 분야들은 국가 안보와도 관련되어 있을 뿐 아니라, 기업의 경영이나 발전이 결정적으로 이러한 부분에 달려 있게 되어가고 있다. 이제는 우리 나라에서도 수학 전문가(technician)라는 새로운 직업이 생길 때가 된 것이다. 수학의 앞날은 밝으며 그 어느 때보다도 역동적이라고 하겠다.

====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우리 수학의 상황을 살펴보자. 지금까지 우리는 근본적으로 선진국들로부터 과학과 기술을 배워오는 방법으로 경제성장을 이루어왔다. 그러나 지적인 경쟁시대에는 현장에 맞는 기술을 배우기도 힘들뿐만 아니라, 현장에서 필요한 기술이 최첨단 기초과학의 연구와 직결되는 일이 잦아짐에 따라, 수학과 같은 기초 학문의 연구가 관건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러면 우리 나라의 수학의 수준은 어느 정도라고 볼 수 있는가? 대략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선진국에서 공부한 우수한 수학자들이 국내에서 자리를 잡음에 따라 수학의 일선은 미흡하나마 선진국 수준에 근접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몇몇 사람이 잘 하고 있는 것은 선전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국가적 차원의 필요에는 부응할 수 없다.

==== 몇 가지 비교를 해 보자. ====

어떤 나라에서 학문의 성숙도를 알고싶다면,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학자의 수이다. 우리와 그런 대로 유사점이 많은 일본을 보자. 1970년도에 일본수학회의 회원은 2,922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인이 기억하는 대한수학회 회원의 수는 1975년도에 200명 정도였다. 물론 당시의 경제적 여건의 차이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1997년도 일본수학회 회원수는 정회원만 5천명이 넘는다. 대한수학회 회원은 겨우 천명 정도이다. 일본 인구가 우리의 두 세배가 된다는 점을 감안해도 비례적으로만 우리의 두 배는 된다. 수학회의 회원수가 갖는 의미는 그 사회에서 수학에 직접적 관심을 갖는 사람의 수이다. 따라서 우리 나라 사람들은 수학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다른 기초과학에도 관심이 없다.) 이는 국민 개개인의 잘못은 아니다. 수학에 관심이 있고 없는 것은 일차적으로 국가 정책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본다.

미국의 보편적 대규모 대학이라면 보통 주립대학들로 학부 학생수가 30,000명 가까이 되고 교수수는 2∼3천명 정도인 학교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유수한 대학의 일년 총 예산은 1980년대 말에 10억 달러 수준을 넘어 있었다. 이 수치는 아마도 당시 고려대학교 1년 총 예산의 10배 정도에 해당할 것이다. 1988년 당시 일본 와세다대학교의 일년 예산은 4억 달러에 육박한다. 지난해 고려대학교 예산은 10년 전의 두 배가 조금 넘는 2,300억 원 정도에 불과하다. 물론 외국 대학의 예산도 그에 걸맞게 늘었을 것이다.

예산이 두 배라면 학교도 두 배정도 좋은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작년 고려대학교 예산에서 인건비만 따로 보아도 약 40%에 달한다. 총 예산이 10배인 미국 대학에서 교직원 일인당 인건비는 우리 나라에서보다 10배씩이나 될 이유가 없다. 따라서 그 부분은 상대적으로 교직원의 수에 비례할 것이다. 이러한 부분들을 제외하고 나서 실제로 설비나 도서, 기자재 등의 기본적시설(infrastructure)에 장기 투자되는 부분만을 비교하면 10배가 아니라 수십배의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가 수십년씩 쌓인 결과는 그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근본적 차이를 야기한다. 결국 선진국에서는 그 나라 어디서도 마음만 먹으면 바로 찾아볼 수 있는 자료가 우리 나라 안에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거나 혹시 있어도 전국에 한 두 군데뿐인 현실이 되고 마는 것이다.

선진 국가들이 학문의 발전을 이룩한 예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유럽은 오랜 동안에 걸쳐 발전해온 것이므로 접어두고, 20세기에 들어서며 급격히 발전한 미국과 일본을 보자. 미국은 제 1, 2차 세계 대전을 지나며 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은 유치하였다. 이에는 새로 발전하고 자유로운 나라라는 이미지도 한 몫을 하였겠지만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진취적인 안목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일본은 더욱 뛰어난지도 모른다. 이미 한 세기 전에 일본은 당시 가장 발전된 나라인 독일에서도 가장 뛰어난 수학자들을 장기간 유치하여 스스로도 선진 수학 이론을 개발할 수 있는 단계에까지 발전시켰다. 이 수학자들은 단기간씩 방문한 것이 아니라, 몇 년씩 걸쳐서, 전적으로 일본에서, 학자를 양성하였다. 우리는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일이다.

==== 문제의 심각성에 대하여 ====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하여 논의하기 전에 우선 문제의 심각성을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학교 재정과 재원 확보의 문제는 나중 이야기이고, 수학자의 수에 대하여 조금 더 생각하자.(편의상 수학회 회원의 수를 그 기준으로 이야기하자.) 앞에서 말했듯이 지난 25년간 우리 나라에서 약 800명 정도의 회원이 증가했다면, 지금은 수학과 졸업생의 수가 조금 증가하였으므로, 사회적 여건의 변화가 없다면 다음 20년 동안에 천 여명의 회원이 늘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 것은 최근에 수학과 같은 순수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이 나빠지고 있는 것은 감안하지 않고서 예상한 것이다. 이 경우 2020년 정도에 가서 겨우 인구 대비로 현재 일본 정도의 수준에 이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을 따라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다. 이런 식이라면 10년도 가기 전에 확실한 낙오 국가가 되지 말란 법도 없어 보인다.

이에 반하여 세계 수학계는 연구면에서 최근 10년 동안에 괄목할만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이 가운데 뚜렷한 특징을 몇 가지 볼 수 있는데, 우선 양적인 발전이다. 발표되는 논문의 수를 보면 근래의 1∼2년에 발표되는 수는 7∼80년대의 10년 동안 발표되던 논문의 수를 능가하는 것 같다. 가히 폭발적이다. 수학의 쓸모가 늘어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고, 수학자의 수가 늘고 있으며, 연구의 기법이 발전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둘 째 특징은 수학의 여러 분야들이 통합되는 양상을 띄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서로 분리되어 상호 교류 없이 연구되던 수학 분야들이 연구 방법론들을 서로 바꾸어 적용함으로써 빠른 발전을 이루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기하학과 위상수학이 서로를 연구하기 시작한지는 이미 오래 되었으며, 이제는 해석학과 기하학이 융합되고, 수학 여러 분야에 대수학과 확률론의 방법이 섞여들었으며, 위상수학과 해석학이 다시 합쳐지는 등, 이미 수학의 분야를 옛날처럼 분류하는 것이 시대착오적이라고 보일 정도가 되었다. 이 추세는 수학 안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벌써부터 이론 물리학분야에서는 물리학자와 수학자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있다.

또 한가지 특징은 응용수학에 있다. 10여년 전만 하여도 응용수학이라고 하는 분야는 거의 수치해석학만을 지칭할 정도로 컴퓨터를 사용한 계산문제에 편중되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수학의 전 분야가 응용수학이라고 할 정도로 범위가 넓어졌으며, 그 적용 대상도 물리학과 공학의 몇몇 분야였던 것이 지금은 이·공학 전반은 물론 인문 및 사회 과학의 방법론으로 다양화되고 있다. 이 말은 수학이 응용수학자를 통하여 타 분야에 응용되던 예전의 방식에서, 보통 수학자들에 의해 현장에서 직접 응용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으며, 이는 다양한 수학 분야의 전문가들이 양산되어야 함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종합하여 보면, 우리는 지금 세계와 견주어 우리 수학의 퇴보를 논하고 있지만, 사실 이것은 우리 산업의 경쟁력의 절대적인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산업체에서 기술을 개발하는 것만으로는 게임이 안되는 때인 것이다.

====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 ====

앞에서 생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는 수학의 교육과 연구에 어떤 효율적 투자를 하여야 하는가? 논의는 많다. 대학 재정을 확충하기 위하여도 그렇고, 초·중·고등학교의 여건을 위하여도 그렇다. 또 수학을 공부하는 것이 개인적인 성취를 위하여도 훌륭한 방법이 되도록 사회적 여건을 개선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이 것은 이 일에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해야만 될 수 있는 일이며, 국가 정책적 차원에서 심각함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논의되는 여러 가지 방법에 대하여 그 어느 것이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또 획기적인 새로운 방법을 찾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보통 수학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에서 이 문제에 접근해 나가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가 궁극적 목표로 삼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수학에 대한 인식의 변화이다. 이는 단순히 수학이 중요하다라는 것을 알리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단순한 기능적 수학을 익힌 사람들의 수요는 줄어들 것이고 능동적으로 방법을 개발하며 수학을 쓰는 사람들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리라는 것과 이런 수학이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알릴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근에 매스컴을 통한 노력들이 돋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어느 한 두 사람의 몫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하여야하는 일인 것이다.

한편, 중·고등학교의 수업에서는 학생들이 문제를 잘 풀도록 가르친다. 그러나 문제를 잘 풀게 교육받아도 현실에서는 쓸모가 없다. 문제가 나쁘기 때문은 아니다. 될 수 있으면 생각하지 않도록 배우는 결과이다. 빠른 시간에 많은 문제를 실수 없이 푸는 것은 여러 가능성과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새 시대에 필요한 것만 꼭 빼 놓고 가르치는 것이 아닌가? 대학에 들어가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한다면, 물론 고등학교 교육이 대학 입학 시험을 무시하고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도 소를 위해 대를 잃는 것이 아니겠는가? 입학시험과 관련하여 이 문제는 깊이있게 그리고 다양하게 연구할 문제이다.

이와 비슷한 현상은 대학에도 있다. 산업체에서 대학 졸업생을 뽑으며 원하는 것은 현장의 문제, 눈앞의 문제에 익숙한 사람이다. 그러나 변화하는 사회에서 수 십년간 일해 나갈 사람은 눈앞의 도구만 익힌 사람이어서는 안된다. 변화에 적응할 수 있는 생각과 능력이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키워야 하고, 이런 사람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앞에서 언급한 현대 수학의 발전된 연구 방법의 하나는 수학자들이 토론을 통하여 생각을 교환하고 창의적 문제 해결능력을 키우는 것이다. 팀을 이루어 개개인의 사고력의 한계를 뛰어넘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법에 익숙하도록 만들려는 교육은 어려서 시작할수록 좋다. 특히 창의적 사고력은 다양한 경험에서부터 나온다고 본다. 이를 위하여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의 하나는, 보통은 쓸데없는 생각이라고 부르는 다양한 사고 경험이라고 생각된다. 즉 현실 문제와 관련하여 수학적 공상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주면 어떨까하는 생각이다. 또 이론을 공식으로 외우는 것을 지양하고, 오히려 주어진 이론이 성립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생각해보는 방법도 좋아 보인다. 반례를 통해 이론을 익히는 방법은 예와 증명을 통해 익히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 ====

가르칠 때 무엇을 하라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나쁘다고 듣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나라에서 수학(기초과학)을 발전시키는 것은 긴 시간을 필요로 한다. 수학이란 학문은 발전에 들인 노력에 대한 효과도 서서히 나타나는 학문이다. 이런 학문이 자라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은 중도에 환경을 바꾸는 것이다. 특히 하지 않아야 할 것이 정책을 바꾸는 것이다. 물론 부분적으로는 더 나은 방법을 찾고 꾸준히 변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커다란 정책의 기조는 변함이 없어야만 한다. 정책이 조금 못해도 꾸준히만 하면 그 효과는 충분할 것이다. 실제로 선진국들은 여러 가지 서로 다른 정책과 제도하에서도 훌륭히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것은 입학 시험과 관련된 문제에서도 볼 수 있다. 완벽한 입학시험 정책은 있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어떤 정책을 세우더라도 기본 골격이 변하지 않는 것이다. 자주 바꾸는 것은 그에 따라 변화하는 일선의 교육 방침이 뿌리를 내릴 틈이 없다는 점에서 최악이다.

또 하나는 다양성을 죽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 현장에서 학생 개개인에 따른 학습내용과 시간의 다양성이나, 학교들 사이의 교육 방침과 내용의 다양성이나, 또는 여러 정책과 계획에서의 다양성 등을 될 수 있는 대로 살리는 것이 결정적인 것이다. 다양성이 없는 것은 발전할 수 없다. 변화의 여지가 없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분야나, 어떤 대학에 투자를 집중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그 밖의 분야나 대학의 발전을 저해하는 정도가 되면 얻는 것 보다 잃는 것이 더 많게 된다. 다양성으로부터 생기는 경쟁과 역동적 변화를 차단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학교 밖에서 공부하는 것을 막지는 말아야한다. 특히 과외 학습의 경우이다. 오늘날 보는 과외와 학원은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며, 또 과열 과외는 사회적으로도 정말 큰 문제이지만, 이 문제는 어렵더라도 새로운 쪽으로 더 나은 방법을 모색하여야한다. 하기 편하다고 해서 공부에 관한 다른 길을 전부 막는 것은 원칙적으로 또 하나의 다양성을 잃는 길일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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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에 바라보는 우리의 교육문제는 암울하게 보이는 한편 희망이 느껴지기도 하는 매우 복잡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에는 많은 요인들이 꼬리를 물고 있으며, 이들은 서로를 물고 돌고 돌아 결국은 어느 한가지도 꼬집어 말할 수 없게 하고 있다. 굳이 든다면 20세기 말에 들어 급격히 가속화된 변화의 물결을 따라잡지 못하는 우리 전부의 무능력정도이다. 그렇다면 결국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려는 일의 자연스러움이 자연스러울 수 있도록 보살피고 돕는 것뿐이 아닐까? 과욕은 항상 부작용을 낳는다. 마찬가지로 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가 하여야 할 것도 사람들이 바른 인식을 갖도록 노력하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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