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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난주에 중국에 다녀왔다.

중국 시안(西安)에서 수학사학회를 하는데 참석차 다녀왔는데 아무런 obligation 없이 다녀온 것이어서 마음이 조금 편한 감이 있다. 물론 우리 학회 전 회장님을 수행하는 일이 있었지만...

중국말을 잘 하는 이박사님을 수행원으로 참여시켜서 정말 편했다. 안그랬으면 아마도 아무것도 제대로 못했을 것이다. 


중국은 두번째이고 2년전에 충칭(重慶)을 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여행이었다.

충칭은 중국이 한국을 초대한 학회여서 대접이 융숭했었고 많은 사람들이 갔었지만 그쪽에서 우리에 대한 준비를 많이 했던 학회였다. 이번 학회는 물론 학회 준비는 많이 했지만 우리는 그리 대단히 중요한 참가자에 끼지 못하는 듯 했다. 


중국 안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두 곳이었지만 전혀 다른 지방이었다. 정말 대비되는 두 도시였는데 충칭은 산지이고 시안은 평지인데, 충칭은 비가 많이 오는 듯하고, 수목이 잘 자라고 사천지방의 특색을 갖춘 시골같은 곳이었는데, 시안은 메마른 공기에 먼지가 많고, 커다란 성으로 둘러싸인 오래된 대도시의 면모를 갖춘 중국의 가장 오래되고 오랫동안 수도를 했던 도시의 느낌을 조금은 간직한 도시였다.


단지 이것이 이미 1000년이 넘은 옛날 이야기이다 보니까 현대인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리 impressive하지 않고, 지금은 중국의 변방같이 느껴지는 곳이 되어서인지 현대식 발전은 아직 많이 들어오지 않은 듯한 조금 이중적이면서도, 확실히 중국같지만 외국같은 느낌은 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4박 5일을 있었지만 도착한 날은 학회가 없었고 떠나는 날은 아침 일찍 나왔으니 실제로 3일을 있었다. 이 가운데 2일은 확실하게 학회에 참석했고, 마지막날은 알아들을 수 없는 중국 사람들의 영어 강의를 뒤로하고 몇 군데 근처 관광지를 돌았다. 이곳은 예전 중국의 장안長安이라 불리던 곳으로 주周나라부터 시작해서 진나라 한나라 당나라 등의 수도였던 곳이어서 많은 유적이 있는 곳임에 틀림 없다. 몇 군데 절도 보고 싶었고 비림碑林도 한 번 봤으면 했지만 모두 못했다. 대신 마지막날 본 것은 반파촌半坡村이라는 신석기시대 유적지와 진시황릉이었다. 반파촌은 처음 듣는 곳이었지만 꽤 큰 유적지이고, 나중에 책을 읽어보니 20세기 후반의 중국 고고학 발굴의 성과의 하나라고 할만큼 중요한 유적지라고 되어 있었다. 상당히 오래전의 유적지임에도 거기서 출토된 유물들이 매우 발전된 형태를 띄고 있었다는 것은 놀랍다. 하지만 중국이 열심히 중국 주변의 문명이 반파와 같은 중국 중심의 문명에서 전파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어도 실제로는 그러지 못하고 중국 전역에서 유사한 정도의 서로 독립적인 문명이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많은 유적지를 발굴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컬 하기도 하다.


2000년 전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했을 때보다 500년도 더 전부터 이지방이 중국의 중심지였다는 것은 내게는 전혀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나는 장안이 중국 고대의 대도시의 하나라고만 생각하였지 이곳이 가장 오랜동안 수도였다는 것은 전혀 몰랐다. 그리고 중국의 전체적인 얼굴을 보면, 중국의 가장 오래된 문명인 하, 은(상)의 중국 중심지를 초기에는 서쪽의 변방의 부족들이 쳐들어와서 나라를 세우고 통치한 것이 주에서 당까지이고, 그 이후에는 동북쪽 변방 부족의 원과 청이어서 그들의 수도가 중국 서북쪽 귀퉁이와 동북쪽 귀퉁이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는 것도 전혀 들어본 적이 없다. 이렇지 않은 중국의 나라가 몇 안되었고 이 몇 안되는 중화민족의 나라들은 정치면에서 그리 잘 통제되지 못했다는 것도 아이러니컬 하다.


결국 중국의 실체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침입해온 외세가 중국 땅의 백성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200~300년을 지속하는 것의 반복이다시피 한 것은 현재 중국이 단결을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생각하는 이유가 한족의 단결이라기보다는 이러한 외세의 침입 또는 내부에서의 반란을 두려워하는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인가?


이번 학회의 중국측의 event는 고희가 된 李文林교수의 칠순잔치 겸 이미 40년이 된 중국과 프랑스 사이의 수학사 교류를 축하하는 event였고 이런 사실에 무지했던 나는 마지막날 저녁의 만찬장의 분위기를 보고서야 이 학회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그 때까지는 단순히 학구적인 컨퍼런스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1970년대초부터 프랑스 수학자들이 중국 (당시 중공)을 방문했던 것은 이문림 교수의 공로일 것이고, 이러한 유대관계는 중국(동양) 수학사를 유럽에 소개하는 창구가 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니덤교수가 중국 과학기술사에 대한 treatise를 집필했지만 꾸준한 연구는 프랑스가 더 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고, 특히 그 자리에 왔던 Martzloff 교수를 위시한 많은 프랑스 수학사가들이 중국말을 쉽게 하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순히 역사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기록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의미를 철학적 입장에서까지 분석해보는 수준의 공부를 하고 있는 그들 중에는 20세기 부르바키 학파의 거장의 하나인 캬르티에 교수가 80의 나이에도 시안을 찾아서 발표를 하고 자신의 이야기로는 처음 시안에 온 것이 1972년이었다는 것이니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너무 좁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 드는 생각은 능력 부족과 함께 수학공부하고 수학사 공부하고 중국말도 배우고를 다 할 수 있는 환경에 있는 그들이 부럽다는 것이다. 왜인지 우리는 이런 것이 잘 되지 않는다. 왜일까? 나만 혼자 못한다면 나의 능력을 탓하면 되지만, 그들은 모두 다 하고 우리는 모두 다 못한다면 다른 이유가 있을 터, 이런 것을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이 나라 교육을 맡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중국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보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제대로된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고 이런 것이 빛이 나는 날이 올 것 같다. 우리는 특별한 노력을 해야지만 적은 숫자로 핸디캡을 극복할 수 있겠지... 거기서 본 일본 교수님들(나의 선생님뻘)도 이러한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보였다. 지금 잘나가는 일본의 학자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여름에는 HPM이라는 수학사 학회를 우리나라에서 연다. 여기 왔던 사람들 가운데 몇 명은 거기도 참석할 것이다. 준비할 것이 훨씬 더 늘어난 것 같고 생각할 것도 많이 늘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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