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맥의 OS를 업글했더니 (13.4) shell이 bash에서 zshell로 바뀌었다. cshell, zshell은 옛날에 linux에서 써 보고 안 써 본 것이라 (사실 shell 자체를 별로 관계하지 않았더라서) 뭔가 에러가 나는데 그냥 뒀었다.

 

최근에 python에서 뭔가 돌려보려고 하는데 jupyter notebook에서 패키지를 부르면 moniforge의 conda 환경에 설치된 패키지를 못찾는다. 얼핏 구글링을 하다 보니 해결책이 있기는 있어서 여기 적어둔다. 

이유는 아마도 miniforge를 설치할 때는 bash였는데 zsh로 바뀌니 설정이 모두 따라오지 못한 듯한데 그렇다고 miniforge부터 밀어버리고 싶지는 않아서 미적대고 있었다.

 

방법은 jupyter notebook에게 어떤 python을 쓰는가를 알려주는 것이고 이것을 jupyter의 kernel을 지정해 주는 것 쯤 되는 것 같다. 여기 사용되는 것은 ipykernel이라는 패키지이다. 지금 사용하는 환경 안에서 다음과 같이 설치하고 실행한다.

python -m pip install ipykernel
python -m ipykernel install --user

이렇게 하고 나니까 패키지 설치도 제대로 (제 자리에) 하고 찾기도 잘 찾는다.

그리고 python도 homebrew가 설치한 것을 부르려고 하지 않고, 또 miniforge가 base에 설치한 것을 부르지도 않는다. 

하지만 다른 데서도 확인은 해야 할 듯.

 

매 env마다 한 번씩 해 줘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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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부터 피아노를 좀 많이 듣는다. 근래 우리나라에 뛰어난 피아니스트가 많이 나와서 좋은 연주를 듣는 일이 많다. 유튜브는 음악 감상에 큰 역할을 한다. 최근에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한 임윤찬은 그 중에도 눈과 귀를 사로잡는다. 젊기때문만은 아니다. 들어본 중 가장 명료한 음을 들려주고 또 음악도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어떻게 변해나갈지 궁금하다.

 

지난해와 올해 초 유럽 투어가 있었나본데 연주에 대한 프랑스 언론의 평이 좋다고 누군가 유튜브에 올렸다. 아마 잘 썼겠지만 최근에 각광을 받는 DeepL을 시험해보느라 몇 가지 번역을 해 보고 있는데 이 평론 기사도 번역해 봤다. 음악은 이론을 아는 것이 전혀 아니라서 아마도 음악 용어겠지 싶은 것도 제대로 용어를 사용해 번역하지는 못한 것 같다. 기사 내용을 편집해 파일로 올려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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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로즈의 책

수학/수학책 2021. 8. 14. 17:34

우연히 Roger Penrose가 쓴 책 The Road to Reality를 보게 됐다. paperbound로 된 두꺼운 책이라 잠시 빌려 놓고 언제 읽어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오늘 잠시 서문을 봤는데 수학 공식을 쓰지 않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기로 했다고 써있다. 그러니까 그냥 수학으로 설명한다는 말 같아서...

 

알라딘, 교보 등의 책방에 들어가니 한글 번역도 있다. 누가 이런 책을 번역하지 싶지만 정말 힘든 일을 했다고도 생각되고 여기 나오는 수학을 다 아는지도 궁금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내용의 일부분이 내 전공이지만 나도 잘 모르는 부분이 많은데...

하지만 책에 대한 평에 보니 사람들이 자연의 실체를 수학으로 설명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들 썼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학생들에게 수학을 강의하면서 그리고 나도 수학을 이해하려고 고민하면서 깨달은 것 하나는 이미 어딘가에다 썼던대로이다. 즉 무엇인가에 대해 알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어떤 틀에 이 새로운 무엇을 갖다 맞출 수 있을 때이다. 물론 정말 새로운 것은 잘 맞지 않는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틀들 가운데 가장 잘 맞는 것을 가져다 맞추게 되고 이를 바탕으로 이것을 더 탐구해보다 보면 내 틀을 보완할 수 있게 된다. 즉 더 확장된 틀로 바꾸면서 이 새로운 대상을 이 새로운 틀로 이해하게 된다.

이 틀은 예전에 다른 것을 이해하는 틀이었으므로 이 새로운 틀은 예전에 알던 것과 이번의 새로운 것에 모두 맞춰볼 수 있는 틀이 되고 나는 이 새 틀에 익숙해지면서 이 둘을 (서로 비슷한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착각일 수도)을 가지게 된다.

 

펜로즈 교수가 이 책을 쓸 때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이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그에 대해 무엇인가를 쓰려고 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자연의 법칙 또는 물리의 법칙을 여러 가지로 설명한 것을 보고 여기서 하나 또는 그 이상의의 새로운 관점을 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현대물리와 같이 복잡하고 이상한(!) 것이다 보니, 위에 설명한 바에 입각해서 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는 틀이 별로 없다. 즉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것을 가지고 있을리가 없다. 이 비슷한 것도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펜로즈 교수는 수학을 많이 그리고 잘 알고 있을테니까 이 자연의 법칙에 맞춰볼 수 있는 수학적 틀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고 이 가운데서 자신이 알아볼 수 있었던 부분과 잘 맞는 틀을 찾았을 것이고 이 책에서는 이런 부분을 설명했을 것이다. 그가 서문에서 수학 공식을 그대로 사용하겠다고 한 것은 바로 이 틀 밖에는 가져다 쓸 것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일반인에게 해설하는 책이니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하기를 바라겠지만 일반 언어로 된 틀 가운데는 이 목적에 맞는 틀은 하나도 없는 것이 (적어도 내게는) 명백하고 보면 그가 무슨 책을 쓴 것인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그 내용을 안 봐도 안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자기가 알아낸 insight를 적어놓고 싶은데 지금은 이를 적을 수 있는 언어(틀)가 수학밖에 없어서 할 수 없이 수학으로 설명한다는 말이다. 그가 제목을 "실체에 이르는 길"이라고 붙인 것이 사람들이 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호도한 것이라면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이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려워도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펜로즈 교수의 상황과 어려움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이런 상황을 한번 쯤 생각해보고 나서 그의 책의 제목을 본다면 설마 그가 수학을 모르는 사람에게 물리적 실체를 해설하려고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안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십년 전에 박사를 갓 받았을 때 어떤 잡지에서 당시 발전하고 있든 초끈 이론을 설명하면서 물리적 공간에 존재하는 물질이라는 것은 별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공간(11차원인지?)의 일부 방향이 에너지때문에 그 위치에 매우 심하게 휘어져서 (예를 들면 원자 하나의 크기만큼으로 돌돌 말려)있는 것일 뿐이고, 다른 원자(내 몸의 말려있는 원자 하나)가 공간의 그 위치에 가면 두 말린 공간이 서로 풀어지기 전에는 위치를 서로 바꿀 수 없어서 (에너지 부족이다) 그 지점을 못지나가니까 두 물체가 부딛친 것으로 느껴진다는 설명을 읽은 적이 있다. 기하학을 전공한다고 하는 사람도 이런 (수식을 쓰지 않은 말로 한) 설명이 잘 상상이 되지 않는데...

 

수학 전공자가 이 책을 읽으면 분명히 뭔가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반인도 이런 책에서 조금 다른 것이더라도 무언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과학 잡지 American Scientist인가 하는 것은 그 목표가 자기 잡지에 설명되는 정도의 과학 내용은 미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믿음으로 글을 쓰는 것이라고 하고 있었다. 실제로 이 잡지 내용은 미국 대학원에서 강의 교재로 자주 사용되는 내용들이 많다는 것을 들어 알고 있다. 비록 이 잡지의 목표가 조금 과장된 것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일반인이 과학과 수학을 어느정도는 알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과학을 겉으로 말만 할줄 아는 것이 아니다. 이 잡지의 내용은 실제로 그 과학을 이해하는 수준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새로운 보통 사람들이 과학을 이 수준으로 알아야 하는 시대가 됐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 관심의 대상인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바꿔 놓는다. 특히 일상생활에서 내려야 하는 여러 결정 단계에 개입하고 있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할 때 예전에는 잘 아는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면 충분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인들도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전문가보다 나은 결정을 내릴 수 있다. 물론 인공지능을 잘 아는 사람만 가능하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과 이 능력의 유무에 따라 나뉘는 두 그룹의 경제적 차이는 매우 커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이런 능력은 예전에 정부의 개발 정보 같은 것을 빼내서 투자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와 비슷한 능력을 인공지능을 통해서 얻는 것이라고 보이는데... 예전의 방법들은 불법적인 방법이었다면,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와 있다면 펜로즈 교수가 자기가 설명하고 싶은 것을 조금 전문적으로 설명해 놓는 것은 미래를 위해 중요한 이야기를 전달해 주는 것이다. 자기 생애를 걸쳐 알아낸 아무도 모르는 비밀을 사람들에게 전해주려는 데 적합한 말이 수학밖에 없는 상황은 너무 잘 이해된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이다.

아직 책은 읽어보지 못했다. 펜로즈 교수가 한마디를 설명하는 데 1000쪽을 사용했는지 아니면 수많은 여러 가지 내용을 해설하고 있는지 아직 모른다. 누군가가 이 내용을 장별로(34개의 장이 있다) 요약해서 설명해줄 수 없을까? 하나하나 다 읽기는 너무 힘들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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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단상

기타 2020. 3. 22. 14:34

페북을 통해서 다음 기사를 보게 되었다.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번역에는 빠진 부분도 있는 듯하지만 (생략이라 표시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항에 한 두 마디 첨언을 한다.


원글:

https://amp.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일부번역:

https://m.clien.net/service/board/park/14737544?od=T31&po=0&category&groupCd&fbclid=IwAR2vEHgcmBztRdA62dpvd91ABY6xM8Tpcp_5JtHL9E5L6EBe9b4WuT7Pwr4


이 기고자의 평가에서 우리나라가 대응이 잘 되는 이유로 몇 가지를 들고 있으며 확산 방지에 대한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이것이 내게 주는 느낌은 반은 "시민의식이 높아졌다"고 하는 느낌과 함께 "시스템을 믿지 못해서 스스로 조심한다"는 느낌 또한 반이다. 이는 이만 쓰고 줄인다. (태클 금지)

반면에 시민의식이 모자라 보이는 몇몇... 어딘가에 모여 뭔가를 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가 있다)에 대해서 이사람들이 안 그랬으면 하고 또 그래도 된다는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들 개개인에 대해서는 뭐라 해주고 싶지만 아마도 이것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한 방편의 발현이지 싶은 점이 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에 대한 해결책(인류가 생존해 나가기 위한방법)은 단견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잘못을 하고도 살아남는 방법은 아무리 좋아보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뭔가 반대의견을 내기도 하고 또 자신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여럿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당연한 답을 줘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갖가지 선택을 하는 사람을 둠으로써 인류의 대부분이 이 당연해 보이는 선택을 따르다 멸종에 가까워져도 이 바보같은 다른 선택한 사람들이 남아서 다시 인류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이 남은 인류는 당연한 것도 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니까 이제 남은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만 남아서 인류는 망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이렇게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달라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 가운데서 무작위로 이런 경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무수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적자생존을 통해서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진보하기도 했고, 또 지금 설명한 것처럼 무작위로 이상한 선택을 하는 개체를 통해서 사람 그대로를 보존해 나갔을 수도 있다.

즉 코로나사태 같은 것을 겪으면서도 술집에서 여럿이 밤은 지새는 또는 교회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은 혹시 모르는 잘못에 대한 대안으로서 (=코로나를 이기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벽하기 실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당연한 답이 혹시라도 인류를 멸망시키는 첩경인 경우에 대한 대비로서) 바보같은 행동을 해서 아주 작은 이상한 확률에 걸린 경우에도 망하지 않는 대비책을 몸을 던져서 (코로나에 몸을 내맡기면서) 실행하는 부처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에 목맨 사람이 불교에서 악으로 선을 실행하는 부처가 된다니 이상하긴 하다.)

이것은 최근 인공지능에서 가장 뜬 강화학습에서, 지금 보기에 최선의 방안을 좇아가는(exploit) 것으로는 제대로 학습이 안되며 바보같아 보이는 선택도 조금씩 곁들여서 미지의 환경을 explore해 나가야만 된다는 것을 알고 greedy algorithm을 적용하는 방법론과 잘 통한다. 아마 이 강화학습의 방법은 종species의 생존 이론에서 따온 것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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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번역했던 글을 옮긴다. 원래 나의 홈페이지에 있었는데 사정상 홈페이지가 변경되고 글을 옮겨두지 못했다. 후카야 교수의 허락을 받은 번역은 아니다. 이 것을 보고 후카야 교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


이 책은 일본의 젊은 수학자(기하학자)인 후카야 켄지 교수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을 써 두는 것은 우선 내가 읽고 싶기 때문이다.  여러번에 걸쳐서 읽고 싶은 책이지만 일본말을 모르는 나로서는 원서를 두 번씩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한 것을 적어두기로 한다.  혹시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후카야 교수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수학자의 시점(視点)

후카야 켄지(Fukaya Kenji)


머리말


   이 책은 “수학세미나”에 1994년 4월에서 1999년 3월까지 연재된 수필 “수학자의 시점”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수학에 관하여, 수학자에 관하여,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쓴 것이다.

   다시 한번 읽어보고, 표현이나 설명이 불충분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소의 보충을 후기로 적었을 뿐, 많은 수정은 하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를 화제로 삼고 있지만, 고지식하게 정면으로 부딪혀 논하느니 보다는, 가볍게 이야기한다라는 것이 “수학세미나” 연재 중의 스탠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학과 수학자에 관한 잡담을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그 중에 현재의 수학과 수학자가 처해있는 상태를 다소나마 느낄 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수학세미나” 연재 중에 많은 도움을 주신 일본평론사의 橫山伸씨, 연재를 책으로 만들어주신 이와나미서점의 松永眞弓씨, 宮內久男씨에게 이 곳을 빌어 감사함을 전합니다.


1995년 12월

후카야 켄지



1.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하여


포앙카레는 고차원을 보았는가


   Computer Graphics가 유행한다고 한다.  Algorithm을 바탕으로하여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도형은, 때로는 예술가가 만드는 것보다 신비적 매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도형과 같을 정도, 또는 한층 더 신비적인 도형을 수학자는 오랜 동안 연구해왔다.  (새삼스럽게 또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고차원의 도형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과연 수학자는 고차원의 도형을 “보고” 있는지에 대하여 써보고 싶다.

   포앙카레의 “과학과 방법”의 가운데, 공간인식에 관하여 쓰여진 부분이 있다.  포앙카레의 결론은, 간단하게 말하면 삼차원 공간에 있어서 생활한 경험(결국 자기가 공간 내에서 운동한, 그것이 시각과 촉각이 결합된 경험)이 공간인식을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칸트의 선험적 인식 운운과의 관계 등을 논한 철학자도 있는 것 같다.

   그러하지만 포앙카레가 이것을 쓴 당시, 틀림없이 고차원의 기하학의 중심이 될만한 수학, 즉, 위상기하학을 건설중이었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알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포앙카레에 있어서, 예컨대 4차원의 공간이 과연 “보이”는가라는 것은 인식론의 문제라기보다, 고차원의 기하학을 어떻게 해서 건설할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 결론이 이러한 것이었다고 하면 포앙카레로 하여금 결국 4차원은 “보이지 않았다”라고 해야할지 모른다.


도형적 직감


佐藤幹夫씨는 어떤 대담 가운데서 원(圓)의 인식에 언급하여, 원을 이해하려면 “ 이라는 방정식에 의하는 것이 결국 제일 좋다”라고 강조하고 계시다.  위대한 佐藤선생에게 거역하는 것은 분수를 대단히 넘는 일이지만 기하학자로서는, 원이 지니는 도형적 이미지의 면을 방정식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  머리 속에 그려진 둥근 이미지야말로 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인간의 뇌 가운데 시각에 관한 부분은 대단히 많고, 시각을 통하여서의 인식은 인간이 물건을 생각하는 중심에 위치한다고 한다.  수학에 있어서도 도형적 직감은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이다.  예를 들면, 논문에서는 긴 식으로 설명이 되어있어 이해가 곤란한 것을, 연구집회 같은 곳에서 저자가 그림을 하나 그린 찰나, 곧 알 수 있다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고차원의 도형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것도 역시 도형적 직감이다.  그렇다고 하면 100년 가까운 수학의 진보는 포앙카레에게 보이지 않았던 고차원의 도형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답은 예스이기도 하고 노우이기도 하다.  만일 본다는 것을 보통 우리들이 (눈으로) 물건을 본다.  또는 본 일이 있는 어떤 물건을 생각해 묘사하는, 그런 의미라면, 포앙카레보다 잘 “보이는” 수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현재 한창 연구되고 있는 고차원의 기하학은 도형적 직감 없이는 있을 수 없다.


Exotic한 구면


   예를 들면, exotic한 구면이라는 것을 아는가?  정확히는 7차원 구면과 위상동형이지만, 미분동형은 아닌 도형이다. (위상동형이라든가 미분동형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구라는 보통 것 같으면서 그것과는 다른 것이 7차원에는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에 관하여 서술한 Milnor의 논문은 짧으므로, 위상기하학의 전문가라면 누구든지 Milnor가 행한 구성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형 전체를 눈으로 본 것 같이 생각하고 그려서, 그것이 7차원 구면과 위상동형이기는 하나 미분동형은 아닌 것을 시각적으로 납득하는 것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수학자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고, 그래도 거기에 기하학적 직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우선, 좀 더 쉬운 예를 들어 말해보자.  평면 위에 두 줄의 직선이 있으면, 그것은 (평행하지 않은 한) 한 점에서 교차한다라고 하는 것은 물론 독자는 잘 알 것이다.  그러면 (3차원)공간의 두 직선이면 어떨까?  물론 이 책의 독자는 일반적으로 공간의 두 직선은 교차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그림을 머리로 생각하며 그릴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수학을 잘 못하는 중학생에게 이것을 질문하면, 정답률은 100%에서 어느 정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라도 3차원 공간 안에 두 줄의 직선이 그어진 그림을 보여주면 이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납득하면 다음부터는 그 그림을 자기 혹자서도 머리속에서 생각하여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4차원의 도형적 직감의 쉬운 한가지 예


   이것은 간혹 3차원의 문제로, 실제로 그림으로 그려진다.  그러면 4차원공간 가운데의 두 개의 (2차원)평면이면 어떨까?  이것을 처음 들으면 우선 망설일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에게는 그림을 생각해내서 직접 답을 내는 일을 즉시는 못하기 쉬울 것이다.

   여기서 식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즉 4차원 공간 중의 평면이란 4변수의 두 줄의 연립1차 방정식의 해이며, 이 것은 보통 단 하나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4차원공간 중의 두 개의 평면이 보통은 한 점에서 교차하는 것을 알며, 그러면 다음부터는 4차원에서 두 개의 평면이 한 점에서 교차하는 그림이 어쩐지 머리 속에 그려질 것 같아진다.



Exotic한 구면을 만든다


   이 것이 제 1단계이다.  이 것은 보여지고 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제에서는 이와 같이 “보여지고 있다”는 고찰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체 상(像) 중의 그저 명색뿐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처음에 쓴 exotic한 구면의 경우를 생각하자.  이것을 만드는 한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딘킨도형 을 생각한다.(그림)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은 안 해도 이것은 그래프니가 분명히 눈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4차원 구면의 접bundle을 여덟 개의 딘킨도형에 따라 펴 합한다. (따라서 편다는 의미도 생략한다.)  4차원 구면의 접bundle이라 함은 8차원의 도형으로 4차원 구면에 두께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앞서 말한 4차원 중에서 두 개의 평면이 한 점에서 교차하는 것이 “보인다”라는 의미에서라면 보인다.  그것으로 생긴 도형도 뭔가 보인다는 것에 속한다.  Exotic한 구면은 이 도형의 경계이다.

   여기까지 오면 적어도 필자에게는 이것이 구면과 위상동형이라는 것은 “한눈에”는 알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이 구면과 미분동형이 아니라는 것의 증명이라하면,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 증명의 각각의 스텝은 도형적 직관에 따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의 스텝은 이론으로 결부시켜져 있고, 전체는 그림으로 이해하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본다는 것의 새로운 바람직한 자세


이 설명으로 이해되었는지 어떤지 자신은 없지만, 한가지 강조해 놓고 싶은 것은, 수학의 엄밀성과 추상성이 이 과정에서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수학 이외의 세계에서 무엇을 논할 때, 우리들은 단지 삼단논법만을 따라서 옳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각 단계에서 주장되고 있는 일이 경험에 비추어서 납득하기 어려우면, 어떤 방법으로 논리를 납득하여도 그 결론은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자주 그 각 단계에서의 정당성의 지침이 되는 경험이 결여되어있다.  시각적 직감으로 아는 것은 부분상(像)에 불과하다.  직감을 잃었을 때 사용되는 것은 논리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엄밀한 증명을 통하여 많은 사실을 집적하였을 경우, 최후에 몇 개의 도형적 직감(어떤 것은 직접 시각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이 얻어진다.  그리하여 이해가 깊어져가는 것을 보여져간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고차원을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주 연구실을 청소하다, 고교생 때 읽던 책이 몆 권 나왔다.  상대성이론이라든가 우주론이라든가 하는 계몽서와 더불어, 사차원 공간이라든가 뭔가가 (다소 애교스럽게) 써있는 책도 있다.  당시 수학을 공부하면 차원이 높은 공간이 눈에 보일 것이라고 동경하고 있던 일이 생각난다.  그 기대는 저버렸다.  결국, 기하학의 전문가가 되어도 4차원의 도형을 눈으로 본 것 같이 생각해 그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 본다는 것의 새로운 바람직한 자세는 알았다.  상상력과 논리의 결합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2. 피카소 미술관에서 생각한 일


피카소와 北齊


   근래에는 백화점의 일부에 전람회용 공간이 잘돼있다.  이러한 장소와 옛날부터의 미술관과의 한가지 차이는 전시의 종류로, 독립된 미술관이라면 여러 시대로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작품을 모아 놓았는데 대하여, 전람회라고 하면 특정한 사람의 작품만을 전시한다는 점이 많다는 것일 것이다.  이점에서 피카소 미술관 같은 것은, 오히려 백화점의 전람회에 가깝다.  현대의 작품을 필자와 같은 비전문가가 보는데는, 차라리 특정인의 그림이 여러 장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쪽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다 빈치라던가, 반 아이크라던가, 北齊라던가라면, 한 장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 시대의 즉품을 한 장 (예비지식 없이) 보고, 이 것이 훌륭한 작품임을 알아내는데는, 보통 감수성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적어도 필자에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만 열 장, 스무 장이라도 보고 있으면, 그것이 회화의 표현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된다.


과학자가 지녀야할 능력


   이와 같은 20세기의 예술과 19세기까지의 예술의 자세의 차이를,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문화적 생산물에서 자립시킨 작품 그 자체의 가치가 희박해져서, 그것이 생겨난 사회적 상황과 그에 주어진 영향과 같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의미”를 빼내고 나면 작품이 말하기 어려워진다고 요약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문화적 생산을 위하여 요구되는 능력도 다양화된다.  예를 들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실험실을 빌린 것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해야할 실험을 적절히 판단하여,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예산을 획득하여, 또 그것을 훌륭히 해낼 수 있는 스태프를 모아‥‥‥라고 하는 것이 과학자가 지녀야할 능력으로서, 작지 않은 부분인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떨어진 연구실에서, 주위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으며, 터무니없는 연구를 완성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SF의 세계에서만 있고, 인간과 상대하기가 싫은 과학자는, 자금을 모으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영화도 찍지 못하는 “천재 영화 감독”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인가?


수학자의 세계


   수학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을 길게 쓴 것은, 아마 수학자의 세계야말로, 사회적 상태와 관계없이 가치가 정해지는 문화적 생산물이 존재하며, 다만 수학을 잘하는 “것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마지막 자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가지 면으로는 또 확실히 그렇다고 보인다.  갈루아(Galois)나 아벨(Abel)의 이야기(1)는 이제는 옛 이야기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뛰어난 가치를 지닌 업적은, 가령 아무리 몹시 서투르게 설명되어있어도, 우선 그 가운데에서는 이해되고 평가되며, 우수한 업적을 올리는데 값비싼 실험 설비가 필요하지는 않다.  많은 연구자와의 교류는 확실히 힘이 되지만, 변변히 정보를 갖지 못한 세계의 한쪽 구석에 있는 무명의 수학자가 대리석을 발견하는 것도 아직까지는 가능하다.

   SF에 나오는 mad scientist를 그대로 하는 수학자도 아직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학생 상대의 강의든지 공동연구자 상대의 토론이라든지 같은 어조로 지껄인다.  화려한 퍼포먼스등과는 관계없이, 학회에서 발표할 때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잘 보이기 위하여 훌륭하게 선전문구를 생각하거나, 전문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알기 쉽게 다소 부정확해도 예를 들어 이야기하거나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엄밀하게 논문에 쓰는 그대로 정리를 서술하고, 논문과 같은 어조로 증명을 한다. (필자가 하고 있는 것 같은, 논문 이외의 잡문을 쓰고 있다든가 하는 “타락”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한 수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상아탑 속에서밖에 살아나가지 못할 우물안 개구리 연구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수학의 진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연구자들이며, 그런 사람들이 살지 않는 세계가 되면, 수학의 세계의 매력은 반감되게 된다.  키튼의 영화는 단지 우당탕거려 우습기만 해서 채플린과 같은 깊이가 없다든지라고 말하는 동안은 영화팬으로서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고, 진정한 영화팬은 키튼의 “예(藝)”야말로 영화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정리와 증명을 일견 무미건조하게 되풀이하는 가운데 프로의 예(藝)가 있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수학에서라면, 옳다고 증명해버리면 누구도 할 말이 없다.  선전이 훌륭하던 그렇지 않던, “사회적 상황”이 어찌되었던, 우수한 정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예를 들면 채점방식의 피겨스케이팅에 비하여 100미터 달리기가 가지고 있는, 깨끗함을 기분 좋게 생각하며 수학자가 된 사람은 (필자를 포함하여)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수학의 세계도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현대수학의 리-더들


지난번의 국제수학자회의京都(1990년)에서 위튼(Witten)이 Fields상을 수상했을 때, 江口徹씨는 일본수학회지에 실린 소개글에서, 위튼을 통하여 물리학자가 현대수학의 수법을 교육적 효과를 언급했다.  수학 쪽에서 보면, 위튼에 의해 수학자가 현대의 소립자론의 수법을 받아들이게된 것은 위튼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수학자 아티야(Atiyah)의 1980년 이후의 업적을 볼 때, 아티야 자신이 새롭게 증명한 정리도 그러한 것처럼, 그것보다도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아티야가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하여 수학의 진보 방향을 리드한 그 영향력이었다.

   다른 분야에서는 그것은 당연할지 모르지만, 수학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정리를 증명했다던가 정의를 했다던가 밖의 일이 업적으로 취급받는 일은 오히려 드문 일이다.  그러한, 예컨대 교육적 효과 같은 것은, 지금은 오히려 일류수학자들의 여기(余技)로 간주되고있었던 것같이 생각된다. (결국 그것이 되면 그것도 훌륭하지만,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일은 아닌 정도의 평가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힐버트(Hilbert)의 “수학의 문제”의 제출 등, 예외도 있지만)  그리하여 만일에 영향력이 수학자의 능력의 주요 부분이 된다면, 우물안 개구리로 여유롭게 수학을 하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티야도 위튼도 강연의 명수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그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수학의 세계의 매력


   그렇다 하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최후의 파라다이스도 붕괴 직전일까?  필자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리를 그냥 증명하는 것 밖의 부분도 중요하고, 그러한 것도 정확히 평가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안다.  예를 들면, 전문가 외의 사람들에 맞게 개설(槪說)을 쓴다던가, 혹은 수학자 이외의 사람에게 수학을 설명한다던가가 수학의 세계에서는 2류의 일로 간주되어온 것은 확실하고,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최후에는 엄밀히 증명된 정리와 그것이 지니는 객관적 가치로 승부하는 것이 수학세계의 매력의 많은 부분을 형성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후의 보루


   20세기의 많은 예술은 예술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가지로는 작품 개개의 자립된 가치가 희박해져서, 새로운 표현양식의 제시라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일이 창조의 전면에 나타난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 일이 과연 20세기의 예술에 바람직한 일이었나를 논할 자격은 필자에게는 없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가 어떤가를 빼고 말하자면, 결국,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한 쪽에서는 거대과학이 발전하여, 연구한다는 일이, 독립된 가치관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창조로부터, 조직 가운데서 톱니바퀴의 하나로서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으로 바뀌어, 영향력을 지니려면 정치적 능력을 필요로하게 된다는 일이 일어난다고도 듣는다.

   그렇다고 하면, 순수수학을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창조의 최후의 보루로서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IHES(고등과학연구소) 체재중에 찾아간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1) 둘 다 너무 시대를 앞서간 까닭에 이해되지 못하고, 젊어서 세상을 등진 것으로 유명한, 19세기의 수학자. 타카기 테-지(高木貞治) “근대수학사담”(이와나미 문고)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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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친분을 통해 읽게 된 어떤 글에서 이 분야 박사 한 분이 미래의 인공지능에 대하여 말씀한 것이 있다. 미래에는 인공지능을 모든 사람이 사용하게 될텐데 모두 수학을 공부할 수 없을 것이고 인공지능은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되어서 어려운 수학공부는 필요 없고 인공지능을 활용해서 자신이 하는 일, 또는 사업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공지능들은 지금과는 달리 (마치 통계패키지처럼) 바로 쓸 수 있게 만들어질 것이기 때문에 활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었다.


우선 인공지능의 활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사용할 것이 아니면 뭣하러 배우겠는가? 하지만 위의 견해는 한 가지 가정을 하고 있다. 즉 인공지능이 가르쳐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인공지능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는 것이 쉬워야 어디다 활용할지만 고민해도 된다. 그런데 인공지능이 가르쳐주는 것이 이렇게 쉽지만은 않을 것 같다. 


우선 이렇게 사용하기 쉽다면 모든 사람을 똑같은 상황에 놓인 것이고 인공지능이 있든 없든 차이가 별로 없어야 한다. 이렇다면 (인공지능을 사용하기 쉽다면) 차이는 인공지능을 살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돈을 가지고 있는가에 달렸겠지 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통계패키지처럼 인공지능이 잘 포장되었다고 하여도 이것은 너무 종류가 많을 것이고 정말 여러 가지 답을 줄 것이다. 서로 다 다른 답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요즘 바둑 AI들처럼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 하는 식으로 다른 답을 준다. 그러면 어떻게 판단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또 답을 주는 것도 바둑같으면 다음 수를 예측해 준다거나 가장 좋은 과정을 추천해 주는 것이면 좀 낫지만 이보다 훨씬 복잡한 여러 가지 가능성을 보여주면서 이중의 하나를 선택해라 하는 경우도 많이 늘어날텐데, 이 때 각각의 경우가 어째서 좋은지를 AI 나름의 근거를 들어 설명하게 될 것이다. 이 때 AI가 설명하는 것을 알아들을 방법이 있을지? 예를 들어 바둑에서 다음 수는 a, b, c가 있는데  a는 다음 테이블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고,... 하는 식으로 여러 특성 수치를 들어준다면...?? 이 수치를 말로 바꾸는 것을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런 여러 수치를 설명해줄 수 있는 복잡한 언어 및 개념을 사람들은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개념을 만들면? 불가능하다. 너무 많은 단어를 만들어야하고 각각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AI 자체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데 이를 위한 가장 빠른 길은 이 AI의 수학을 이해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용하기 쉬운 interface를 만들어 인공지능의 활용성을 높이는 것은 한쪽으로는 계속 발전해야 하는 방식이지만 반대로 인공지능의 속을 이해할 능력을 키우는 것이 또 다른쪽으로 경주해야 할 노력일 것이다. 이것은 마치 50년 전쯤에 이제 컴퓨터가 발전하면 사람들은 컴퓨터에게 모든 것을 시키고 노력이 필요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유사하다. 컴퓨터에게 일을 시키려고 해도 컴퓨터를 이해하고 코딩도 하고 문제를 모델링해야 하며 컴퓨터가 하는 말을 이해해야 하는 것처럼 AI에게 일을 시키려고해도 똑같다. 달라진 점은 AI는 자신이 이해한 상황을 설명할 말 (인간의 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사람이 노력하는 수밖에 없고 AI의 생각을 전부 읽어낼 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언어에 가장 가까운 것이 현재는 수학이다. 즉 인간은 지금 사용하는 언어와 개념보다 훨씬 정교하고 복잡한 언어와 개념을 지속적으로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언어의 바탕은 수학적 개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상황을 인지할 수 있다면 미래가 사람에게 얼마나 힘든 세상인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이 때는 정말로 머리가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구별되는 세상이 될지도 모르며 머리가 좋은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것만이 자산이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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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페북 친구중의 한 분이 쓰신 글을 읽고 생각해 본다.


제목은 "중고등 수학의 기형성"이고 몇 가지 문제와 해법을 제시하셨다.


이분의 문제제기는 너무 타당하고 오랜 동안의 문제이지만 젊은 분의 생각은 근래의 경험만으로 결정되기 쉬워서 몇 가지 반론 아닌 반론을 써서 이 분 글을 지지하려 한다.


1. 첫째 문제 제기는 고등학교 문제들이 미적분 일색이지만 뉴턴과 상관없이 수학적 내용만 있다는 것이다. 


맞다. 원래 만들어 놓았던 고등학교 교육과정과 거기서 물어볼 수 있는 문제를 너무 제한시켜서 원래 목적과의 연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기술된 방식이 현실문제와 연관 없는 방식이라고 썼지만, 문제는 원래 교과서(예를 들어 3차 교육과정)를 봐야 한다. 당시는 물론 지금도 교과서 분량을 크게 하지 않아야 하는 제약때문에 수학 설명은 매우 형식적이고 간결하게 쓰여졌지만 목표는 현실에의 응용을 최대한 생각했었다. 미적분 맨 끝에는 물리에의 응용 섹션이 있었고 여기서 기초적 물리 계산법과 1차원적 운동방정식인 2계미방 y''=f를 푸는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물리에 가면 어떻게 미적분을 써서 계산하는지를 연계시켰었다. 그런데 지금은 연계된 문제는 물어볼 수도 없고 이런 응용 파트도 제거된 것이 아닌지?


2차원 이상의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벡터, 극좌표가 없어져서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좌표계는 수학책에 없다. 그래서 2차원 이상의 물리현상을 지금 고등학교 졸업한 학생은 전혀 이해할 수 없다.


2. 전기와 관련된 수학이 없다고 하셨다. 


하지만 전기와 관련된 수학은 기본 미적분만 배우면 나머지는 물리에서 배우게 되어 있었다. 이것이 물리책에서 수식이 빠져나가면서 안 남은 것이지... 내가 학교 다닐 때는 기술 시간에도 전기를 배우고 회로를 배우고 진공관, 다이오드, 트랜지스터를 배웠는데... 이에 대한 물리 이론은 물리 시간에 배우고, 중학교 때 삼각함수 적분값 계산을 미적분 안 쓰고 하는 법도 물상시간에 배웠었다.


3. 컴퓨터와 데이터 과학은 지금 정말 중요하다. 이것과 관련된 행렬이 없어졌다고 하셨다.


예전에도 고등학교 통계는 매우 어려운 과목이었다.(확률보다 더) 지금도 그렇겠지만 지금은 예전의 통계 단원의 내용은 중요성이 그때보다는 좀 떨어졌다. 그리고 이분이 이야기한 데이터과학이 들어오고 있다. 우리 고등학교 교육과정에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머신러닝을 공부하는 교과서를 발행하고 시험운영 중이다. 그 내용도 지금 우리 수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하는 머신러닝 과목 내용의 절반정도의 수학을 포함하고 있고 실제 코딩을 해 볼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이런 새로운 데이터과학을 위해서 배워야만 하는 수학은 행렬 말고도 미적분과 2차원 이상의 공간개념이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는 고차원 즉 10,000차원이나 100,000차원 공간의 개념이 필요하다.) 이것을 어떻게 길러낼 것인가가 미래의 관건이다. 적어도 수학에서는... 그리고 데이터 과학에서는 댓글에 보이는 인도 같이 기초가 되는 수학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데... 또 문제는 데이터 과학에서는 국가 경계가 허물어지므로 세계 최고가 아니면 제대로된 회사도 차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점이다. 수학을 뼈빠지게 공부해야 하는 이유이다.


4. 그래서 제시하신 것이 고전수학을 전면 빼고 현대수학으로 고쳐야 한다고 하셨다.


그것이 일견 맞는 방향 같아보이지만 이것은 이미 70년 전에 미국에서 실패한 New Math 운동 같이 되기 쉽다. 수학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내가 외국에서 발표한 것도 있고 글을 쓴 것도 있는데... 각설하면 


(1) 고전과 현대를 적절히 융합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고


(2) 이것을 선생님 몇 명은 제대로 할지 몰라도 대부분의 선생님과 학생들은 너무 어려워 한다는 것이고


(3) 빠르게 변화시켜나가면 제대로 된 교육방향도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


등등 많은 난관을 안고 있는 것이어서 섣불리 건드리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것이다. 수학교육현대화를 우리나라는 1970년대에 시작했고 미국의 모형 일본의 모형을 적절히 선택해서 생각보다 성공했었다고 보이지만 그럼에도 지금은 뒤로 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성공했다는 점은 우리 직전세대부터 20세기 말까지 우리나라 학생들은 미국 같은 나라에서 수학을 잘 하고 고용하기 좋은 인재로 인정받았다는 점을 보면 된다. 미국 학생들과는 질적으로 전혀 달라보였다. 뒤로 돌아가는 점인 요즘 졸업하는 학생들은 내가 가르쳐봐도 수학은 정말 모른다. 고등학교 수학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 학교에 들어오니까.)


5. 마지막으로 지금 수학이 현실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떠돌고 있다는 말씀인데 이것은 일견 맞다. 


지금 학생들이 현실성을 못 찾는 이유는 수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던 시절에는 현실 문제를 보면 어떻게 접근할지 금방 보였고 또 논의할 수 있었지만, 지금 학생들은 보았던 문제만 풀줄 아는데 현실문제는 한 번도 본적이 없으니까 막막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 문제를 가르치자는 것은 해법이 아니다. 너무 많고 너무 여러 방향의 문제가 있고 이것을 다 가르칠 수는 없다. 지금 식으로 공부하면 아무리 많은 현실문제를 가르쳐도 또 보게 되는 다른 문제는 본 적이 없어서 못푼다. 수학공부하고 이렇게 된 것은 수학이 추상적이 되어서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배운 수학이 너무 근시안적이고 추상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추상적이라는 말은 추상적 공리를 외웠다는 뜻이 아니다. 현실적 문제에서 추상적 구조를 캐치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 추상적 사고를 한다는 뜻이다. 이해하지 못하면 추상적 사고가 불가능하다.) 


한편 지금 발전하는 AI와 기계학습은 매우 구체적인 것 같지만 실은 매우 추상적이다. 내가 몇 년 동안 수학과 대학원에서 기계학습 강의를 듣고 있지만 확률이론을 바탕으로 최대최소를 찾아나가는 현재의 AI는 전혀 구체적이지 않다. 소위 Bayes 식의 정보 갱신이 무슨 의미인지? 그러니까 현실 문제에서 무슨 뜻인지 말고 수학적으로 데이터의 의미에서 무슨 뜻인지를 파악하려고 보면 추상 중에도 추상이다. 많은 데이터가 오면 이중에 여러개의 평균을 내서 정규분포로 바꾸어내는 중심극한정리가 도대체 무슨 뜻인지는 학자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현상은 설명이 쉽다. k개의 평균들은 정규분포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것은 어째서 생기는 현상인지? 그래서 우리 데이터에서 나타나는 파라메터가 정규분포를 따를거다 라고 말하는 것은 도대체 지금 상황이 어떻다는 것인지?)


이런 것에 자기만의 감 (분명히 추상적 감)이 있는 사람만이 현재 데이터과학을 이끌고 나가는 사람처럼 될 수 있을것인데... 이 추상적 감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현실적 감은 문제를 많이 다루고 (물리학 같이, 경제학 같이) 하면 생기겠지만 추상적 감은 수학을 많이 볼 수밖에 없다. 고차원을 제대로 보려면 벡터와 행렬을 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이것이 제대로 느껴지려면 3차원 도형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단지 벡터로 되는 것은 아니고 더 근본적인 기하가 필요하다. 꼭 논증기하일 필요는 없지만 대수 계산으로 바꾼 벡터만으로는 안된다. 그림이 있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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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희 군이 메일로 보내느라 앞 뒤에 인사가 있는 것은 빼고 본문만 옮겨 놓습니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sub-riemannian geometry에서 미분기하의 문제들을 확률론으로 접근하는 게 명확히 보여서 참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고 보고 하나하나 관련된 도구들을 본격적으로 공부해나가기 시작한 단계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확률론의 도구들이 기하학적인 대상들을 이해하는 요긴한 도구임을 알려주는 페이퍼 중 하나는 Atiyah-Singer theorem을 확률론으로 증명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1]

제가 현재 이해하는 선에서는 sub-riemannian geometry는 미분다양체의 탄젠트-번들의 부분-번들(sub-bundle)에 대한 정보만 들고있는 경우, 부분-번들에 bracket-generating condition 등의 (Lie-bracket으로 tangent bundle을 복구할 수 있는 sub-bundle) 추가적인 적절한 조건들을 요구해서 미분다양체를 어떻게 이해할지에 대한 거라고 납득하고 있습니다. Contact manifold, symplectic manifold에서 자연스럽게 위의 sub-riemannian geometry에 해당하는 상황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3]
그리고 sub-riemmanian manifold에 대해서도 submersion, 혹은 foliation이 있는 경우로 한정지으면 fiber가 totally geodesic submanifold가 되는 동치조건을 부분-번들에 주어진 sub-laplacian으로부터 완전히 기술할 수 있음이 알려져 있습니다. (Theorem 2.9 [3]) 그래서 sub-laplacian를 다루기 위한 각 diffusion operator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게 되고, diffusion operator와 관련지어서semi-group이나 heat kernel 등을 이해해나가는 과정에서 여러 stochastic process들과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 같습니다. 

특히 Heisenberg group에 대해 sub-riemannian manifold의 구체적인 예시로서 유용한 것 같습니다. [2], [3] Hisenberg group은 upper half plane의 고차원 일반화인 Siegel half plane을 complex manifold로서 볼 때 이에 대한 boundary에 해당하는 CR manifold입니다. [4] 그리고 하이젠베르그 군의 fractional sub-laplacian은 levy process의 infinitesimal generator가 되는 점과, Brownian motion이 Heisenberg group 위에서 어떻게 기술되는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5], [6]

그 외에 symmetric space의 위상적인 정보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도 확률론이 쓰이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symmetric space의  brownion motion으로부터 기술되는 특정 stochastic process가 어떤 분포로 수렴하는지에 따라 compact와 non-compact를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는 명제를 뒷받침하는 예시까지 현재 알려져 있고 일반적인 명제에 대해서는 open problem으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7]

제 개인적으로는 기하학 공부를 위해서 확률론이 정말 중요한 도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어서 새로운 한 해에 참 열심히 공부해보고 제가 있는 곳에서 sub-riemanian geometry 공부하시는 교수님들 곁에서 좋은 기회를 잡아서 한번 문제들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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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기하학이란 무엇인가?


앞에서 한 이야기에서 여기 저기 기하학이 나타나지만 기하학이 순수하게 도형만을 써서 기하를 한 것은 논증기하학 뿐이다. 당연히 데카르트를 지나면서 가하학은 좌표를 사용하게 되었고 미분가능한 함수를 사용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까 당연히 선형대수와 미적분학을 사용한다. 물론 앞에서 이야기한 편미방을 풀어야 할 때는 해석학도 많이많이 사용한다. 그러니까 기하학이란 무엇인가? 요즘은 대부분 기하학이란 미방을 풀어서 또는 그 밖의 방법으로 기하학적 대상을 구성하는 것이다. 아니면 주어진 기하학적 대상의 성질을 여러 해석학적 방법으로 연구해서 그 대상의 위상적 성질을 발견하는 것 정도로 생각한다.


꼭 말하고 싶은 미분기하학의 기초적 이론은 그 출발을 미적분에 둔다. 그 밑에는 수렴을 다루는 위상이 있지만 미분기하학은 그 부분을 굳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즉 수학 이론 전체에서 미분가능성 아래쪽은 안 들여다본다. 모든 것은 Taylor 전개에서 나오는 것에서 출발하고, 모든 것을 미분이 주는 선형구조 (미분형식)으로 바꿔서 이해한다. 이것이 19세기 말의 기하학자들의 결론이고 결국 카르탕이 만들어 준 새로운 미분기하학이다.


미분기하학만 공부하다 보니 다른 수학은 공부하기 어렵게 느껴진다. 특히 확률론을 들여다보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마치 수렴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반위상수학을 공부하면 예와 반례들을 모두 따져 보던 것과 똑같다. 이런 저런 거리를 다루면서 특징을 알아보는 것과 똑같고 함수공간에 어떤 위상이 잘 맞는지를 찾느라 무한차원 선형위상공간의 이론을 연구하던 때와 똑같다. 20세기 중반에 선형위상공간의 이론이 난무하던 적이 있었지만 무엇이 어떤지 알고 나서는 복잡한 위상들은 다 사라진 듯하고 소볼레프와 횔더, L^p 정도 남아서 서로 잘 엮어서 사용되는 것같다. 여기도 결국 필요한 것만 남기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미분기하가 복잡한 수럼은 다 없애고 smooth 함수와 미분형식만 남겨서 잘 살고 있는 것처럼.


확률론은 그럴 수 없는가? 왜 항상 시작하면 가측함수로 내려가는가? 실제로 구체적인 예도 제대로 들 수 없는 것들인데... 미분기하처럼 stochastic Taylor 전개 정도를 기점으로 그 아래는 모두 버리고 이토 미적분 (또는 이와 비슷한 것들)의 공식만을 가지고 출발해서 훨씬 직관적으로(기하학적으로) 바꿔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밑은 누군가 한 번 해봤으면 충분하다. 집합의 기초론을 아무도 걱정하지 않고 사용하듯이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확률론은 아직 집합이 AC나 CH를 가지고 고민하던 시절이나, 함수해석이 온갖 이상한 위상(pseudo norm으로도 정의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을 가지고 헤매던 시절과 같은 수준의 이야기를 써야 설명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기억력이 일천한 나는 이런 설명은 더이상 감당할 수가 없다. 학부 때, 대학원 때 몇 번 해본 것으로 더 파고들 힘이 남아있지 않다. 임박사가 이런 부분을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에게 숙제를 준 반대 급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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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을 설명하려니까 결국 기하학은 없는 이야기가 되고 만다. 좋은 일이다. 무엇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것을 모두 이해하는 것과 원리적으로 똑같고 방법적으로는 이 편이 더 낫다. 그러나 기하학에 대해서도 할 말은 있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반의 수학 및 물리학 발전은 우리에게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다. 리만이 한 일 (오일러가 단초를 놓은?)이 발단이 되었지만... 오일러 수, 한붓 그리기, 리만의 타원함수이론과 리만면,... 이런 것을 보면 문제의 해결에는 국소적인 계산과 이것을 이어 붙여서 전체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독특한 방법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즉 오일러 수가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국소적 현상(꼭지점, 모서리, 면 등)을 잘 붙이면서 곡면 전체의 모양을 설명해 주는 무엇인가(실제로는 위상적 표현)를 얻는다는 것이다. 미분기하에서 이것이 적나나하게 보인다.


19세기가 끝날 때까지 미분기하는 이탤리에서 연구되었다. 이것도 리만이 미분기하를 공부하는 방법을 이탤리 학자들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독일은 바이어슈트라스가 (또는 디리클레 빼고 모든 다른 수학자들이) 리만을 디스하려 했던 덕분에 리만한테서 아무 것도 못 얻었다. 리만을 독일은 디스하고 몽땅 이탤리에게 넘겨준 듯.) 이 이탤리 학자들이 연구한 것은 굽은 공간에서의 기하학적 미적분이었지만 이것은 완전히 국소적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19세기가 끝나면서 이론 연구도 끝이 나서 당시 이것을 연구했던 사람들은 '이제 미분기하학은 끝났다' (망했다는 뜻이 아님,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고 이제는 사용하기만 하면 된다는 뜻임.) 라고 호언장담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국소이론 끝 대역이론 시작'에 해당되는 시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단지 몇년만에 돌멩이 한 개가 나타나서 세상을 뒤집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만든 것은 단순히 우주 어느 점에서도 (그 근처만 봤을 때 = 국소적으로) 물리학 이론이 똑같다는 가정과 당시 실험으로 알려진 빛의 속도가 정해져 있다는 사실만 가정하고 이룩한 것이다. 그러니까 국소적 가정만으로 전체가 어떻게 돼야 하는지를 알아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리만이 보여준 것을 물리에서 재현한 것인데. 물론 리만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모르면서 한 것이다. 어쨌든 덕분에 모든 사람들이 우리 우주는 어떻게 생겼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을 푸는 것은 국소적 물리 모델을 모두 모아서 전체의 위상 등등을 알아내겠다는 구상이 되었다.


당연히 기하학적 문제인데 이것을 해결한 것은 원래 오일러가 했던 것처럼 붙이는 부분을 잘 count해야 한다. 즉 대수학을 사용했고 결국 리만처럼 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말하면 대수위상수학 문제로 귀결되었다. 그래서 호몰로지 이론을 개발하고 열심히 연구하게 되었는데... 여기까지 도달하는 데도 편미분방정식의 숨은 역사가...


사실 처음으로 이런 문제를 제대로 해결한 것은 일본의 숨은 해석학자 오카였다. 오카는 고차원 복소영역 안의 코시리만 방정식을 풀려고 했다. 2차원 복소원판의 곱 형태의 영역에서 적분으로는 쉽게 풀 수 있는데 그 밖의 영역에서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오카가 낸 아이디어는 이렇게 국소적으로 푼 해를 이어 붙여서 전체로 확장된 해가 존재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를 연구하였고 이것이 대수위상적 조건이란 것을 알아냈다. 이것은 대학 1학년 미적분의 뒤쪽에서 벡터장의 포텐셜함수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와 본질적으로 똑같다. 그때의 답은 벡터장의 정의역 가운데 일종의 본질적 구멍이 있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이고 오카도 똑같은 식의 답을 얻었다. (진짜 구멍만은 아니지만...) 그러니까 편미방을 푼다는 것은 두 가지 일을 해야 한다. 각 점의 충분히 작고 모양도 예쁜 영역에서 푸는 것... 이것을 국소적 이론이라 부른다. 보통 함수해석학을 쓰는 것... 그 다음에 이것을 이어붙여서 공간 전체로 확장되는 조건을 찾는 것. 이것은 코호몰로지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해석학자들은 여기서 앞부분만 하고 있는데... 그것도 compactness를 잘 사용하는 방법 밖에는 모른다. (근사해를 찾고 이것을 계속 낫게 바꿔나가서 해로 수렴시키려고 하는데... 수렴하는지 보려면 우리가 찾아나가는 함수열이 compact 집합 안에 놓이는지를 보이면 되고, 이것은 거리를 잘 재서 해결하는 방법이다. 아마 아직도 모든 함수해석이 이런 방법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 아닐지 싶다.


결국 아직도 기하에는 못 들어갔네...ㅠㅠ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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