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단상

기타 2020. 3. 22. 14:34

페북을 통해서 다음 기사를 보게 되었다. 자세히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리고 번역에는 빠진 부분도 있는 듯하지만 (생략이라 표시된 부분이 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사항에 한 두 마디 첨언을 한다.


원글:

https://amp.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일부번역:

https://m.clien.net/service/board/park/14737544?od=T31&po=0&category&groupCd&fbclid=IwAR2vEHgcmBztRdA62dpvd91ABY6xM8Tpcp_5JtHL9E5L6EBe9b4WuT7Pwr4


이 기고자의 평가에서 우리나라가 대응이 잘 되는 이유로 몇 가지를 들고 있으며 확산 방지에 대한 시민의 자발적 참여가 중요하다는데 동의한다. 이것이 내게 주는 느낌은 반은 "시민의식이 높아졌다"고 하는 느낌과 함께 "시스템을 믿지 못해서 스스로 조심한다"는 느낌 또한 반이다. 이는 이만 쓰고 줄인다. (태클 금지)

반면에 시민의식이 모자라 보이는 몇몇... 어딘가에 모여 뭔가를 하는 사람들 (여러 가지가 있다)에 대해서 이사람들이 안 그랬으면 하고 또 그래도 된다는 것에 대해서 변명하고 싶지도 않지만...

이런 사람들 개개인에 대해서는 뭐라 해주고 싶지만 아마도 이것은 인류가 생존하기 위한 방편의 발현이지 싶은 점이 있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그에 대한 해결책(인류가 생존해 나가기 위한방법)은 단견인 경우가 많고 따라서 최선의 선택이라고 보이는 것이 장기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이런 잘못을 하고도 살아남는 방법은 아무리 좋아보이는 방법에 대해서도 뭔가 반대의견을 내기도 하고 또 자신은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여럿 있는 것이다. 즉 아무리 당연한 답을 줘도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른 갖가지 선택을 하는 사람을 둠으로써 인류의 대부분이 이 당연해 보이는 선택을 따르다 멸종에 가까워져도 이 바보같은 다른 선택한 사람들이 남아서 다시 인류를 유지해 가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은 이 남은 인류는 당연한 것도 못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니까 이제 남은 사람들은 정말 이상한 사람들만 남아서 인류는 망가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만, 아마도 이렇게 주류에서 벗어나는 것은 단순히 사람이 달라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 가운데서 무작위로 이런 경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지금까지 무수한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적자생존을 통해서 사람이 생물학적으로 진보하기도 했고, 또 지금 설명한 것처럼 무작위로 이상한 선택을 하는 개체를 통해서 사람 그대로를 보존해 나갔을 수도 있다.

즉 코로나사태 같은 것을 겪으면서도 술집에서 여럿이 밤은 지새는 또는 교회에서 다닥다닥 붙어서 예배를 보는 사람들은 혹시 모르는 잘못에 대한 대안으로서 (=코로나를 이기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벽하기 실시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당연한 답이 혹시라도 인류를 멸망시키는 첩경인 경우에 대한 대비로서) 바보같은 행동을 해서 아주 작은 이상한 확률에 걸린 경우에도 망하지 않는 대비책을 몸을 던져서 (코로나에 몸을 내맡기면서) 실행하는 부처와 같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기독교에 목맨 사람이 불교에서 악으로 선을 실행하는 부처가 된다니 이상하긴 하다.)

이것은 최근 인공지능에서 가장 뜬 강화학습에서, 지금 보기에 최선의 방안을 좇아가는(exploit) 것으로는 제대로 학습이 안되며 바보같아 보이는 선택도 조금씩 곁들여서 미지의 환경을 explore해 나가야만 된다는 것을 알고 greedy algorithm을 적용하는 방법론과 잘 통한다. 아마 이 강화학습의 방법은 종species의 생존 이론에서 따온 것이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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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슈 유후인을 보다.

기타 2013. 1. 20. 12:37

며칠 전에 2박 3일로 일본 큐슈 북쪽 산 속의 마을 유후인(由布院)을 여행하였다. 온천 마을의 하나이고 조그만 산 속 마을이라 구경할 것이 많지는 않다. 오랜만의 가족 여행이지만 바쁜 와중이어서 계획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딸려갔다왔다. 우리 여정은 인천공항에서 후쿠오카(福岡)공항 까지는 (1시간 정도 걸리는) 비행기로 가서 공항에서 국내선쪽으로 공항셔틀(무료)로 이동하고 거기서 유후인으로 가는 고속버스 (수준은 우리나라 시외버스 수준?)를 타고 1시간 40분 걸려서 유후인 역 앞의 버스정류장에 내렸다. 묵는 여관에서 차를 보내주어서 잠깐만에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후인이란 동네는 정말 작아서 중심지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걸어서 30분 정도에 불과하다. 빠른 걸음이면 20분이면 걷는다. 그 사이를 연결하는 좁은 (차 두대 엇갈릴만한, 인도는 따로 없는) 길이 하나, 차들이 주로 다니는 길이 두어개  평행하게 나 있다. 좁은 길 가에는 가지요지 가게들이 늘어서있다. 반 이상이 먹을것이고, 나머지는 souvenir 매점 등이다. 거기 가서 할 일은 먹는 것과 목욕, 그리고 이 가게들과 동네를 둘러보는 것이다. 



점심을 먹은 곳 근처의 갤러리/식당의 입구 복도 (GalaxyIIHD)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맛집으로 되어있는 한 집에 가서 국수를 먹었다. 그쪽은 산 위쪽으로 조금 언덕진 곳이어서 점심을 마치고 걸어내려오며 일본의 시골 풍경을 보았다. 여관에 들어와서 짐을 제대로 풀고 목욕을 하고(?) 아이들은 동네 구경을 했다. 저녁을 먹고 다시 목욕. 여관에서 저녁식사를 주는데 일본의 여관 식사는 처음이라 방에서 받아서 먹는 식사를 신기하게 경험했다. 가족들은 밤에 다시 큰 공중탕에서 목욕을 하고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새벽 공중탕에서 잠시 목욕을 하고 제공되는 아침 식사를 하고 동네 구경을 나갔다. 킨린코(金鱗湖)를 구경하고 사람이 바글거리는 먹자골목(?) 쪽으로 나가지 않고 반대쪽으로 나가서 동네 절 龍峩山 佛山寺를 보았는데  역사가 천년 정도 되는 절이다. 바깥만 구경하고 내려오면서 스테인드 글래스 박물관과 작은 교회 건물 등을 보고 점심을 먹었다. 이 동네 토종닭(지도리,地鷄)이라고 하는데 맛도 괜찮고, 음식 입맛은 여기서 보는 화려한 일식들과는 조금 다른 편안한 맛이다. 여관 음식도 조금 고급스럽지만 맛은 역시 조금 시골풍이랄까? 편안한 맛이라는 말이 맞는 듯하다. 점심후에 모든 사람들이 걷는 길을 걸으며 구경하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은 옛날 풍 일본집 거의 그대로이다. 아마 각 별채의 입구만 손본 듯. 부분 부분은 우리가 어릴 때 살던 일본식 (오카베 집이라고 부르던) 집과 똑같다. 1920년 경에 세워졌다니 아마도 후에 보수를 대대적으로 했거나 중간에 새로 지었을지도 모른다. (1950-60년대쯤) 이 별채들에서 욕탕만은 조금 현대적으로 보인다. 탕은 위 테두리만을 나무로 두르고 안쪽은 큰 타일 내지는 돌로 되어 있다. 저녁 식사 후에는 가족들은 다시 목욕을 했고 나는 방에서 발만 조금 담그고 있다가 잠을 잤다. 


다음 날은 아침 후에 후쿠오카로 떠나서 점심때쯤 도착하였고 점심 후에 백화점을 한 두 군데 둘러보고는 공항으로 갔다. 눈이 많이 와서 비행기가 조금 연발하였지만 별 무리 없이 인천에 도착하였다.



프론트 앞의 소파와 탁자 (GalaxyIIHD)


일본 여행이 두 번째지만 말로만 듣던 여관(료칸) 여행은 처음이어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 여관은 손님들이 재미있게 지낼 수 있도록 여러 가지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아주 오래된 경험을 위주로 한 것이지만... 본채에는 입구 (프론트의) 거실 외에 2층에도 아담한 거실이 있는데 서재를 겨하고 있다. 책상에는 오래된 만년필도 놓여 있는 등 싸구려는 아니다. 이 밖에 별채 사이에 반2층짜리 벽돌 건물을 두었는데 거기는 담화실(談話室)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큰 거실이다. 한쪽에는 꽤 많은 책들이 거의 2층까지 닿는 높은 서가에 꽂혀있고 (높아서 위쪽은 사다리로 올라가야 한다) 안쪽은 한 계단 낮게 소파가 둘러 있는 탁자와 한쪽 벽에 벽난로가 있다. 옛 일본식 베치카가 아니고 서구식 벽난로인데 불을 피워주었다. 우리 아이들은 이 방을 좋아했다. 이 방에는 오래된 골동품도 몇 가지 모아놓았는데. 우선은 1930년대 영국의 축음기가 있었다. SP 음반도 한 세트 갖추고 있었고 amplifier 없이 내 몸통만한 스피커로 나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그 방 안에서  충분히 크게 들렸다. 이 밖에도 오래된 탄노이 모노 스피커를 마란츠 앰프에 물려서 음악을 들을 수 있었고, 벽난로 위에는 나무로 만든 퍼즐들이 몇 개 있었다. 


이집의 식당에서 젓가락을 싼 종이에 도장으로 찍힌 어구가 千里如面이라는 것인데 중국 어느 시에서 따 왔다고 serving하는 아가씨가 이야기했지만 무슨 시인지는 알 수 없고, 일본에서는 편지 봉투에 찍는 도장의 어구로 잘 쓰이는 것인지? 뜻은 대략 "천리를 떨어져 있어도 얼굴을 마주대한 듯이 마음이 통한다"라고 써 있는데가 있지만 이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다. 어쨌든 여관으로서는 잊지 않고 다시 왔으면 한다는 의사표시를 꽤 운치있게 한 듯하다.


쉬러 간다는 뜻의 온천여행이지만 조금은 바쁘게 돌아다녔고, 온천은 괜찮은듯 하다. 단지 대중탕이 겨울이라 공기가 차가운 것은 어쩔 수 없는듯. 아마 노천탕은 더하겠지만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문화여서. 참 말만 듣던 족욕탕을 기차역에서 보았고, 먹자골목 한군데는 족욕탕 안에 작은 피라미들(?)을 잔뜩 넣어놓고 발의 각질을 뜯어먹게 하는 장사를 하고 있었다.


한 마디만 더 써둔다면 이 마을 뒤켠의 산(화산) 봉우리는 우뚝 솟아있고 산정은 하얀 눈으로 덮여있어서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은 由布岳. 그리고 유후인(由布院)이란 이름은 아마도 예전에는 湯布院이었던듯. 아마 발음은 같아서 요즘은 간단히 쓰는 듯하다. 湯을 쓰는 것이 온천 동네 이름에 더 맞는지도. 동네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도시 전체를 관광지로 개발했다하고, 특별히 유곽을 없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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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0.1개

기타 2012. 1. 24. 14:38
오른쪽에 로고로 사용하는 그림파일을 바꾸었다. 원래는 이 블로그의 제목에 맞게 에네퍼Enneper의 극소곡면을 누군가가 예쁘게 (그 속에 들어있는 두 개의 직선도 나타내어) 그려놓은 파일을 썼었다. 저작권 문제는 신경쓰지 않고 쓰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에 스킨에서 나의 이름 부분을 손을 보려고 하니 그림도 없어져버렸다. 그 파일은 어딘가에 잘 있을 것이지만 얼핏 생각나는 다음 사진으로 바꾸어버렸다. 

이 사진은 나의 둘째아이가 찍은 사진에서 일부만 따온 것이다. 둘째의 사진은 이보다 좀 넓은 배경을 찍었지만 나머지는 전부 눈이다 이 부분의 넓이가 전체의 10분의 1을 좀 넘는다. 그래서 사진 0.1개인 것이지만...


둘째는 사진을 잘 찍는다. 미술을 공부해서 잘 찍는 것일 것이다. 사진에 관심이 많아서 이에 대한 강의도 들었다. 하지만 실제로 미술을 별로 공부하지 않았을 때도 사진을 제법 찍었던 것 같다. 아래 오른쪽 사진도 같은 때 찍은 것이다.

미술을 제법 잘 하는 것 같은데 내가 설득을 잘 해서 잠시 접어두게 했으니 잘한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실질적인 것도 공부는 해 두는 것이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21세기는 융합의 시대라고 한다. 전혀 이질적인 것을 두 가지 이상 알고 있는 것이 절대로 나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잘 모르는 데는 절대로 들어 가지 않으려는 고집이 있지만 또 알게 되면 항상 재미있어한다. 너무 여러 가지에 관심이 많으면 천재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게 된다.

그래도 요즈음은 조금  다른 생각이 생겼다. 나의 처조카 가운데 하나가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학부밖에 졸업하지 않았고 공부도 두 분야를 이중전공 했으니 나의 기준으로는 공부 내용을 제대로 알고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겠지만, 그는 이 두 분야를 적절히 잘 활용할 줄 안다. 몇 명이서 같이 사업을 하는데, 이들은 결코 장사 수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이를 만들어 제공하는 사업을 한다. 그것도 서비스업에서... 최근에 운영하는 회사가 잘 되어서 거금을 받고 큰 회사에 넘겼단다. 그는 이 사업을 넘기고 새롭게 할 다른 사업 아이디어도 있는가보다.

이런 것을 보면 여러 곳에 관심이 있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그래도 목표가 없이 너무 여기 저기를 따라다니는 것은 소위 집중력부족에 해당될 것이다. 내 조카처럼 목표가 있고 몇가지만 관심을 두어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정말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어려서 착하고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특히 많았던 조카라서 이러한 변화가 신기하기만 하다. 며칠 전에 만날 기회가 다아 얼굴을 보았는데 마음씀씀이는 20년 전이나 똑같다. 행동만 조금 어른스러워졌다고 할까. 결혼이나 빨리 했으면 하는 것은 나이든 사람이면 누구나 드는 생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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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영화 감상문

기타 2010. 9. 25. 12:56
러브레터(Love Letter)

내가 본 일본 영화는 손에 꼽는다.
일본을 거의 모르고 영화나 문학에 대하여도 문외한이지만 러브레터를 본 감상은 신선한 느낌이다라는 것이다.

스토리가 너무 간단하다.
너무 간단해서 의도적이리라고 생각한다.
마지막에 도서 카드를 받는 장면을 빼고는 모든 부분이 예측되는(?) 짧은 이야기다.

장면이 예쁘다는 것은 너무 많이 이야기해서 할 말이 없다.
눈이 가득한 장면은 항상 고독감을 동반한 경이로움을 주는 것 같다.

이러한 회화적인 요소와 음악을 제외하고는 볼 것을 찾기가 힘들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이 이 영화에서 시와 같은 느낌을 갖게 하는 것 같다. (눈이 뒤덮인 풍경은 시를 쓴 종이 같다. 특히 일본사람들이 잘 쓰는 - 흰 종이에 붓글씨로 드문 드문 쓴 - 시를 보는 스낌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은 마지막에서 도서 카드 뒤에 그림을 발견하는 surprise에서 더욱 강조된다. 이 영화가 시라면 이 장면이 없어도 될 듯 하다. (시는 말하고자 하는 점을 드러내면 재미가 없다.)

영화 시작에서 보내게 되는 (받을 사람이 없는) 편지가 러브레터이지만 이 것은 겉으로 들어난 러브레터이고 결코 이야기의 핵심은 아니다. 한편 영화를 보는 동안에 남학생이 읽지도 않는 책을 빌리며 적어내는 도서카드에 적힌 이름이 남학생 것이 아닌 여학생 것이리라고 짐작되지만 그 정확한 의미가 뭘까 하고 궁금해진다. (여학생이 이 책을 다 읽는 거냐고 물어볼 때, 남학생은 "읽을 리가 없쟎아"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서 이 모든 카드는 남학생이 보낸 러브레터였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그리고 영화 제목이 혹시라도 놓칠까봐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즉 겉으로 들어난 이야기와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 사이의 이중성이 이 사랑이야기이다. 사실 사랑은 항상 이런 이중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남학생이 겉으로 보이는 무뚝뚝함과 내면적 사랑이나, 영화구조에서 겉으로 들어난 편지와 숨어있는(시적인) 편지, 오랜 옛날의 남학생의 사랑과 지금 여학생이 전해받은 사랑과 같은 이중성은 시적인 표현에 어울린다.

이런 이중성은 드물게 읽어본 일본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적나나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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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글과 마찬가지로 이남호 교수님의 수필집을 읽고 쓴 것이고 이 또한 장난스럽다.



혼자만의 시간

이남호 교수님의 산문집 "혼자만의 시간"을 거의 안 읽고...

이교수님의 새 산문집 "혼자만의 시간"을 혼자만의 시간에 읽으며 혼자만의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건 "너 자식을 알라"와 무슨 관계인가?) 지난번 책을 읽는데도 꽤 뜸을 들였었다. 한번에 다 읽어버릴 가벼운 내용이 아니어서인가. 다음쪽에 무엇이 나올까 하는 궁금함이 앞서는 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글을 읽고 나면 다음 글로 바로 들어갈 수 없게 하는 것이 있었다. 이 책도 그런 것 같다.

그렇지만 "혼자만의 시간"은 그 보다 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글과 같이 여겨지고 글들 또한 지난번 책보다 짧아져서 시집을 대하고 있는 느낌이 난다. 이교수님의 생각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책의 편집과 디자인도 더 아기자기하다. 무뚝뚝한 수학책만 보고 그런 책 하나를 한 겨울 동안 편집한 나에게는 수학책도 시집같이 쓸 수 없을까 하는 바램이 생겼다.

역시 나는 순서대로 쓸줄 밖에 모른다.

겉표지 안쪽에 이교수님의 소개가 있다. 이전 책에도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난다. 있었으면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매우 궁금하다. 이 소개는 "... 책을 많이 쓴 사람을 미워했는데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간다. 내가 바라는 내가 잘 안 된다." 로 맺고 있다. 내 친구가 어딘가 썼던 말 하고 비슷하다. 나도 이 비슷한 말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정확히 뭐라고 해야할지 모르겠다.

"고독만큼 좋은 친구는 없다고 하지만, 고독한 삶보다 고독을 잃어버린 삶이 더 견디기 어려울 것 같다"라는 말을 읽으면서 "(하나 남은 친구인) 고독 조차도 잃어버렸으니 당연하지..."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은 수학을 공부한 사람의 병폐인가. 199쪽에서 "수학적 두뇌가 탁월한 사람이 다른 면에서는 멍청하게 보이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의 경우에는 탁월하지 못한 두뇌로 수학과 씨름하기 때문에 다른 면에서는 멍청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 주변에는 수학적으로 탁월한 두뇌를 가지고도 전혀 멍청해보이지 않는 사람이 여럿 있다. 어쩌면 그들도 멍청하지만 내가 더 멍청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글머리에(여기까지는 제대로 읽었다) "어머님께서도 읽으실 수 있는 책을 내게 되어서 기쁘다"고 했다. 반성을 하게 만드는 말이지만 나는 이 책을 내 글 대신 어머님께 보내드려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이번 책의 제목은 책 속의 첫째 산문의 제목과 같다. 그래서 나는 몇쪽 안읽고도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다 읽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이 글에서 말한 혼자만의 시간은 "나"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었다. 이 것은 "음악"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특히 한가지 이 글에서 내가 얻은 위안은 내 방의 전등불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겠고 내 방의 컴퓨터도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좋을 것이라는 것이다. 가끔 갖던 학교 경비를 축내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주는 이야기이고, 나 같은 사람이 또 있구나 하는(의도야 다르더라도) 안도감을 전해주는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이야기도 이런식으로 슬쩍 말해버릴 수도 있구나 하고 감탄하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 글은 컴퓨터로 쓰고 있다. "시간 도둑"에서 우리 시간을 빼앗는 컴퓨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지만, 나는 컴퓨터가 있기에, 혹시 읽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 글을 남들 보라고 여기에 올려놓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이건 분명 유위(有爲)이다.) 물론 이 글을 올려 놓는 일 자체가 또 남들의 시간 도둑을 하나 더 만드는 일이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한다면 또 잘못된 무위(無爲)에 빠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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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독후감 하나

기타 2010. 9. 25. 12:38
시간은 많이 있으면서도 자주 글을 쓰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바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면 누군가의 말을 베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방치해 두는 것 같아서 예전에 썼던 독후감을 한두 개 올려두려고 한다. 내 홈페이지 위키의 구석에 있는 것이지만, 그리고 정식 독후감이 아닌 장난으로 쓴 글이지만 이 독후감을 읽어본다고 왔다가 독후감에 실망해서 원래 글이나 읽어보자라는 생각이 든다면 뒷걸음질에 뭐 잡는 것이 되겠다.

이 글은 90년대에 이남호 교수님께서 이 책이 출판 되자 내게 한 부 주셨고 이것을 읽고 곧바로 내 홈피에 올렸던 것인데 언제인지는 날자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

독(毒?) 없는 독후감

이남호 교수님의 산문집 "느림보다 더 느린 빠름"을 조금(!) 읽고...

"빗자루 없는 마귀할멈
지니가 나오지 않는 요술램프
혹은 요술램프 없는 알라딘
도깨비 방망이 없는 도깨비
목성 없는 목성 우주탐사선
책 없는 도서관이나 물 없는 저수지
같은

문화 없는 문화시대
에 관한

산 없는 산문집"
에서

남호(나무)랄데 없는 이남호교수님의
가(ㄱ)이 없는 꿈을 담은 글
을 읽고

독 없는 독후감
을 쓰다.

김영욱

(참고:
일반적으로
글을 못 쓰는 사람들의 독후감이
다 그러하듯이
이 독후감도
대부분
위 책의
머리 없는 머리말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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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에 따라서 내 컴의 Firefox는 블로그의 본문 내용이 사라진다. IE에서는 잘 되는 것 같은데.. 스킨의 버그인가? 내컴의 버그인가? 아님 티스토리의 버그인가?

어쩌면 이 스킨만의 버그인지도...

고수님들의 도움이 필요한 듯...

Firefox에서는 이렇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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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E에서는 이렇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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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이 아빠의 글을 읽고서 처음으로 한글 간소화 파동이라는 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래 된 이야기이고 탁상공론 쯤 되는 정책이 발표되고 철회되는 것은 너무 많이 보아왔으므로 일견 별로 특별한 사건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내용을 읽어보며 조금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외할머님은 19세기 말에 태어나신 분으로 일기를 비롯한 글을 많이 쓰셨다. 나는 외할머니와 같이 살았으므로 어렸을 적에 글 쓰시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랐는데, 학교를 다니면서부터 외할머니는 철자를 잘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어려서부터 글을 배우셨으므로 글을 쓰셨지만 아주 옛날 식으로 쓰신다고만 생각했고, 내 생각에 철자법이 없던 시절에 발음대로 쓰시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왔다. 그런데 도은아빠의 글에 있는 옛날 철자법을 읽어보니 할머니가 쓰시던 것이 그 철자법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구한말에 쓰던 한글 철자법이 제대로 된 것이 있었던가, 아니더라도 공통되는 쓰는 규칙은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고, 아마도 당연한 이 사실을 전혀 생각해 보지 못했던 것이 이상하기도 하다.

그 글에 댓글을 쓰고 거기에 또 답을 받고 생각해보니 그 댓글에 썼던 '고난이도'라는 말은 발음이 틀리는 말은 아니었다.(조금 문맥에 맞지 않는 예가 되었다.) 이 예를 들었던 것은 요즈음에 여러 곳(방송, 신문 등)에서 이 말을 자주 쓰는 것을 보게 되는데, 내가 학생시절에 선생님들을 통해서 많이 들었던 이 뜻의 말은 항상 고난도였지 고난이도라고 하셨던 분은 한 분도 없었다. 그래서 이 말을 듣는 순간 매우 어색한 느낌이 들어 왜 이런 말이 쓰이게 되었을까에 생각이 갔던 기억이 난다. (비록 고이도라는 말은 잘 안 쓰지만, 잘 쓰이는 난이도는 쉽고 어려운 정도라는 뜻이리라 생각한다.) 아마 사람들은 난이도에서 높은 쪽은 난도쪽이라고 당연히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학을 공부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난도와 이도는 방향만 바꾸면 정 반대로 늘어놓을 수 있는 동등한 두 방향으로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난이도에서 높은 쪽이 난도쪽이라는 생각에는 조금 거부감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말이 쓰이는 것은 아마도 한자의 뜻을 전혀 생각하지 않아서 생기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한자를 쓰느냐 마느냐 하는 것도 큰 논쟁거리지만, 그리고 나는 이 문제에서 딱히 어느쪽이 더 좋은지 판단하기 어렵지만) 내 경험으로는 단어의 구조를 생각하지 않게 되면 많은 단어를 그대로 외워야 하고, 이것은 더 복잡한 단어에서 뜻을 밝히기가 힘들어지는, 그래서 뜻이 모호해지는 부작용이 있는 것 같다. 서구의 언어에서도 latin이나 greek의 어원을 찾으며 자신들의 말을 사용하는데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최근의 언어학은 기존의 언어와 다른 변형된 언어를 사용하는 집단(사회)의 언어도 또 하나의 언어로서 존중해 주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미국의 흑인영어는 이러한 대표적인 것으로 이것도 제대로 된 영어라고 한다고 한다. 어떤 집단이 변형된 언어를 공통언어로 사용한다면 이 또한 분명히 rule을 가지는 언어임에는 틀렴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변형이 말 그대로 rule의 변형이 아니라 rule이 없어지는 것이어서 그 변형된 rule의 모음(집합,set)이 원래 rule의 모음의 일부분(subset)이라면 이것은 새로운 언어라고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이것은 단순히 그 말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같은 문장의 띄어쓰기가 여러 가지 변형을 가지면서 몇 가지 rule을 따르는 것은 한 가지 rule만을 강제하는 것 보다 더 다양한 rule을 가진 더 복잡한 언어로 변형된 것이지만 (발전은 아닐 것이다), 한 단어의 부분 부분을 나누어 생각해 보지 않고 단어를 만들어 쓰는 것은 일견 여러 표현이 생겨 말이 풍부해지는 듯이 보이지만, 문법 규칙이 없어지는 쪽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말이 규칙을 잃어버리면서 퇴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말의 퇴보가 꼭 나쁜 것은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진화의 과정에서 말의 퇴화현상일지 모르고, 이를 통해서 우리말 사용에 유창fluent하기보다는  우리 말에 조금 덜 유창한 대신 동시에 여러 나라 말에 유창해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이런 것을 모두 알고 정책을 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러 가지가 유행하면 비록 틀려보여도 그냥 두어볼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단지 rule에 잘 맞는 유창한 한국어가 보기 힘들어지고, 언젠가는 우리 말에서 maximal set of rules를 활용하는 사람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는 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기우이더라도 그와 유사한 방향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만으로도 조금은 우울한 느낌이 있다.

다시 돌아가서 이승만대통령의 아이디어는 잘못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아직도 이 문제에서 변화와 유지라는 두 방향가운데 어느쪽이 옳은지는 확실히 결정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이승만대통령의 잘못이라면 이것만이 옳다고 고정시키려는 것일 것이다. 어째서 옳은지 득실을 따지고 이에서 장기적으로도 최대한을 얻을 수 있는 방향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이 문제에서 이승만대통령이 하려고 했던 것이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니었던 것처럼 어쩌면 현재의 맞춤법만으로 고정시킨 것때문에 우리 할머니 세대가 생각하고 사용하던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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