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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문에 서울대 사학과 3개 (국사, 동양사, 서양사)가 통폐합해서 사학부로 된다는 뉴스가 나왔다. 이와 함께 1950년대 말에 (어떤 학과는 1940년대에) 여러 학과로 갈라졌다가 근래에 들어서 다시 하나로 합친 학과들의 역사도 도표로 나왔다. 


우리가 대학을 다닐 당시는 모든 학과가 분리되어 있었다. 예를 들면 2000년대 들어서도 고려대에는 전기, 전자, 전파 등이 유사학과이면서 나뉘어 있었다. 사회적 필요나 여러 여건상 학과가 나뉘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한다. 단지 나뉘기는 쉽고 합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람 사는 세상인 점은 어디나 마찬가지이다.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이 기사 맨 마지막에 실린 서울대 어느 관계자의 커멘트인데 애초에 분리된 이유가 "전공 교수들 사이의 갈등과 주도권 다툼" 때문이라고 하고 이 교수들이 은퇴하면서 합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위의 나누기 쉽고 합하기 어려운 데에 이러한 갈등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은 맞다. 그러나 실제로 학과가 나뉠 때의 상황에는 다른 문제가 있었다.


예를 들어 생물학과 3과가 생겨날 당시 학과 안에서는 많은 갈등이 있었을 것이다. 직접 보지도 못하고 전공도 문외한이므로 자세한 것은 알 길이 없으나 이리 저리 따져보면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작용했을 것이다.


  1. 세 가지 전공, 동물, 식물, 미생물이 서로 다른 것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2. 동물학과 식물학은 이미 낡은 것이지만 대부분의 교수가 이것을 전공하고 있는데 갑자기 미생물학 중심의 학과로 변모시키려고 하면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아마 대안이 없었을 것)
  3. 생물학은 그 크기가 자꾸 커지는 중의 학과였는데 대학은 학과의 교수 정원이 학생수에 비례해서 정해져 있다. (학교는 이런 것을 개선하지 않음)


이 가운데 1, 2번은 같은 맥락의 이야기이고 이러한 일이 있으면 없던 갈등도 생긴다. 그러니까 교수 사이의 갈등은 이런 상황이 야기한 부분이 크고 학교는 이를 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당시는 그런 능력은 전무했다고 보인다. 한편 3번 문제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는데 학교 당국은 이런 것을 개선할 의지가 없었다. 당시 문교부의 정책이 학생 일인당 교수수라는 지표 하나만 떠받들고 있었으니까 모든 학과에 이 지표를 적용하면서 어느 학과의 교수수를 파격적으로 늘려줄 생각은 안하고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위의 관계자 말이 틀린말은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 당시 교수들을 매도할 수 있는 발언이다. 실제로 당시에 우리가 느끼던 것은 갈등도 많이 있었지만 될 수 있으면 학과를 늘리는 배경에는 학과를 분리하면 교수를 두 배로 뽑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덤으로 학과장 자리도 두 개가 생기고 대학 안에서 그 전공의 목소리도 두 배로 커진다. 아마 이 상황을 생각하면 교수의 갈등 보다 학과의 정원이 제한돼 있는 상황이 더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미국 대학들의 생물학부가 교수 200명이었던 1980년대의 상황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수학과는 보통 60-100명. 서울대 같은 대규모 공립 대학의 예이다.) 이런 붐을 타고 천문기상학과는 천문학과와 기상학과가 됐고 여러 학과들이 분리되어 나갔었다. 


상황이 변하여 학과의 크기가 커질 수 있게 되고 각 학과 교수들의 전공이 변하고 나니 분리할 요인이 모두 사라져서 합하는 것이 더 이익에 맞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런 통합이 필요한 곳이지만 상황이 아직 맞지 않는 것이 교육학 학과들이다. 수학과와 수학교육과는 합하여 외국처럼 운영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1970년대부터 존재했다. (실제로 1975년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로 이전할 때 두 학과는 같은 건물 안에 배치되었었다.) 하지만 교원 자격을 사범대학 졸업자에 한정하면서 이 두 과가 합할 수 없게 하는 힘으로 작용해왔다. 학교 관계자라면 이런 문제를 언급하는 것이 옮을 것이고, 자기 학교 교수들의 갈등이 전부인양 이야기하는 것은 상황을 호도하는 잘못된 생각이라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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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자살과 공부

교육 2011. 4. 10. 15:50
며칠 전에 대전의 한 대학에서 어떤 학생이 자살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천천히 밝혀지겠지만 아마도 공부 스트레스일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올해 들어 4번째이고 보니 하나 하나의 경우는 다 사정이 다를지도 모르지만 전체적으로는 공부 스트레스가 한몫 하였으리라는 것에 나도 동의한다.

그러면 이 학생들의 자살은 타당한 것인가? 상황이 자살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는가? 그럴 리가 없다. 나 같은 수도권 유수 사립대의 교수에게도 저 자살한 학생의 학교에서 평점이 3.0 미만인 학생은 물론 낙제학생이라도 좋으니 우리 학교에 와서 공부만 하겠다고 하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지도 모른다. 그러니 평균이 3.0이 넘지 않는다고 문제가 될 일이 없다. 혹시 등록금을 추가로 내야 하는 부분이 부담이었을까? 물론 돈은 항상 부담되지만, 내가 유학하던 지난 세기 80년대에 유학생이 중간에 돈이 떨어지면 (물론 대부분 학생들이 집에서 부친다는 생각은 못하는 시절이었으니까) 휴학하고 알바 수준으로 취직해서 돈벌며 공부하였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는 적어도 자살할 이유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

트위터에서 보는 전문가의 의견은 이런 경우들, 특히 한 사람이 자살하면 다른 사람들이 따라 자살하게 되는 도미노 현상은  병리적 현상이고 특히 사회 병리적 현상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한다. 학교의 제도 하나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제도의 문제라면 50년 전에 살기 힘들 때 사람들의 절반은 자살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제도가 잘 되어 있다는 것 또한 아니다. 잘못된 곳에서 해답을 찾지 말자는 것일 뿐.

자살하는 사람의 심리를 잘 이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우울한 상황에서 작은 자극이 자살을 유발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니까 이런 부분을 미리 막는 장치가 필요한 것이고 큰 제도를 바꾸라는 식이나 돈과 결부시키지 말라는 식의 언론의 결론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은 요즘 유행하는 하바드 대학의 유명하다는 윤리학 강좌를 한번 경청해야 할 것도 같다.

이제 공부로 가 보자. 이런 좋은 대학의 좋은 학생들을 잘 교육하려면 개개인에게는 공부할 내용을 잘 가르쳐주는 외에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자극을 주게 된다. 하나는 잘 하고 있다는 격려와 또 하나는 더 잘해야 한다는 압박이다. 이 둘 중에 어느 하나도 없으면 제대로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자살하는 학생의 경우는 이 중에 두번째 것이 너무 크던가 앞의 것이 부족했던 것이다. (반대로 앞의 자극만 많은 경우에는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자기만 잘 안다고 생각하고 너무 나서는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되기도 하지만...) 

그러니까 이런 채찍은 어느 정도 사용해야 하는가 라고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학생만 감당한다면 얼마든지 많이 사용할 수록 좋다. 특히 한 두번은 좌절할 정도의 채찍이 길게는 너무 중요하다는 예를 많이 본다. 나의 동료 교수들 가운데 정말 감탄스럽게 잘 하는 사람들은 공부 도중에 반쯤은 망한 듯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내가 보건대 그 사람들의 강점은 그들 스스로도 망했다고 이야기했던 바로 그 경험이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 망한 순간에 좌절해서 자살하면 진짜 망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런 수재들의 교육은 학생들을 매우매우 힘들게 하되 어떻게든 넘어가게 하는데 핵심이 있다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이 어떻게든 넘어가는 것은 보통 학생들 스스로 방법을 찾아 나가는 그런 문제로 되어 있다. (학생들이 나약하다고 말한다면 이런 방법을 스스로 찾을 줄 모른다는 말이거나, 또는 교수나 선배 동료들이 이런 방법을 찾는 clue를 주는데 못 알아듣는다는 말이다. 진짜 나약하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마다 그 받아들이는 수준과 속도가 다르고 또 받아들이는 내용이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학생은 이것을 잘 하는데 어떤 학생을 저것을 잘한다던가... 어떤 학생은 어떤 이론을 이해해 내는데 시간이 엄청 많이 걸리지만 이해의 깊이는 깊다던가... 게다가 도제식이어서 교수인 내가 책임지고 한 학생을 전적으로 가르쳐도 힘든 판인데, 강의나 하고 시험이나 보이며 일주일에 서너번 멀리서 얼굴이나 보는 학부 교육에서는 학생을 제대로 이끄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안에서 교수가 할 수 있는 역할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이것은 오히려 동료 학생들 사이의 관계가 중요하고 친한 친구나 선후배와 이야기할 수 있으면 해결될 수 있는 문제 같다. 

이번에 문제가 된 경우에 보아도 이 학생은 수학과 전공 과정에서도 제일 어렵다는 과목을 1학년 때 듣고도 학점이 B+인가를 받았다고 하니 수학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니까 수학에서 공부가 힘들어서였다고 말했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영화 `여고괴담'에서 보였던 항상 전교 2등만 하던 학생과 같은 마음상태에서 못 벗어난 것은 아닌가.

그러니까 혹시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는 과목이 있다고 하면 그건 너무 당연하다. 예를 들어 나도 그런 사람이지만 성적도 꼬박꼬박 잘 받고 하는 사람도 공부 못하는 과목도 있다. 나는 학부 때 공부할 때 한 과목 - 현재는 내 전공과목이 된 - 은 이해도 제대로 안 되고 기억도 잘 안 되어서 결국 성적이 D+였나 하는 기억이 있다. 모든 것을 다 잘하지 못한다고 잘못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학부 때 어떤 과목의 성적이 나쁘다는 것이 그것을 진짜로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결국 가장 성적이 나빴던 과목을 제일 좋아하고 전공하게 되었으니까. (그렇다고 이 과목 성적이 나빴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해서 성공한 것이 전혀 아니다. 때가 되어서 공부하니 재미있고 이해가 쏙쏙 되더라는... 다른 학생들은 이 과목이 쉽고 내가 쉬운 과목을 어려워 했으니까 공부하는데 뭐가 어때야 된다는 법칙은 없는 것.)

학생들이 이런 것을 모두 다 알 수만 있다면 자살 같은 것은 안 할 것이다. 선택되어서 과학고, 영재고에 들어가고 또 선택되어서 특수할 정도의 좋은 대학에 들어갈 때 마음가짐은 `여기서도 잘 해야지'라는 바람직한 채찍과 함께, `여기서 1등 못하고 중간쯤 하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겠지. `심지어 꼴찌를 해도 전국 거의 1등인데 뭘...' 이런 생각은 못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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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사의 추억?

교육 2007. 1. 22. 17:43

집안을 정리하다가 책 틈에서 언젠가 신문에서 오려 놓은 글이 하나 나왔다. 김형기논설위원이라는 분이 쓴 글로 제목은 본고사의 추억이다. 이 글을 다시 읽어보며 항상 하는 생각을 다시 한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대학에 들어갔고, 아이들이 입시에 휘둘리는 동안은 우리나라 교육을 완전히 개편하는데 무슨 일이라도 할 것 같던 것이 대학 들어가는 순간부터 먼 딴나라 이야기처럼 들리는 것은 아이 엄마 말이 꼭 맞다. 신문의 글은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지금의 학부모 세대가 입시를 겪은 1970, 80년대의 입시는 예비고사와 본고사의 시험이었다. 그러나 자식세대는 수능+내신 세대이고 스스로 죽음의 트라이앵글 세대라고 부른다고 한다. 내신-수능-논술의 삼각파도에 휘말려 있다고 쓰고 있다.
그 뒤에 쓰여 있는 글을 직접 옮기면
(상략)
그때에는 학원과외나 개인과외를 아무리 해봐야 본고사 성적을 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었다. 수학 같은 과목은 100점 만점에 20~30점만 맞아도 합격할 수 있을 정도로 어려웠다. 객관식 문제의 답을 집어내는 요령만 반복 숙달시키는 학원과외로는 그런 수준의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됐다. 부모가 제아무리 부자라도 자식의 실력만큼은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본고사는 부모의 경제력이 자녀의 학력에 개입하는 것을 차단하는 방어막이었고, 재능 있는 가난한 학생이 공정한 경쟁을 통해 신분상승을 이룰 수 있는 사다리였다.
(하략)
이것은 대체적으로 맞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부모의 경제력은 자녀의 공부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정도에 있다. 본고사 시절에는 무작정 과외를 많이하는 것은 점수가 올라가는 것과 상관관계가 적었다. 요즘 아이들을 보면 그 상관관계가 매우 크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그 교육효과이다. 본고사 시절에 수학 시험을 잘 보기 위해서 학원/과외에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과외의 목표는 수학 내용을 잘 이해하도록 돕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의 수학 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보면 대부분 내용의 이해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특히 내용의 이해에 방해되는 식으로 문제푸는 요령을 가르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육적으로 매우 퇴보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면 지금의 교육 시스템이 더 낫다고 교육부가 주장하는 부모의 경제력에 의한 자식의 학력의 불공정은 어떠한가? 위의 글에서는 예전의 본고사의 경우에 경제력이 별로 영향을 미치치 못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요즈음의 쉬운 수능문제와 4~5지선다형 문제에서는, 얼마나 빨리 문제를 푸는가, 그리고 얼마나 실수를 하지 않는가가 시험점수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된다.(이는 학원에서 어떠한 훈련을 시키는가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학원 선생님들은 어떤 훈련이 점수를 높이는가를 정말 잘 알고 있다.)

문제가 되는 사실은 시험문제가 쉬워지면 시험을 잘 보는 학생과 못 보는 학생의 점수차는 많이 줄어들지만, 정작 원하는 효과인 경제력에 의한 순서를 뒤집을 가능성은 매우 줄어든다는 것이다. 특히 문제를 빨리 푸는 것은 마치 100m 달리기 연습을 하듯이 얼마나 훌륭한 코치가 가르치는가가 매우 중요하다. 즉, 얼마나 돈을 쓰는가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하여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쉬운문제를 푸는데 학생들의 능력차이는 별로 많지 않다. 따라서 달리기와 같은 기본적인 체력차이 같은 것은 별로 없다.)  그러니까 점수 차만 줄여서 평등해진 것 같이 보이게 할 뿐, 실제로 등수를 뒤바꿀 방법은 없으니까 불평등이 가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온것이 학생들의 점수차를 뭉뚱그려서 등급의 수를 줄이는 것이라면, 그래서 시험본 결과에서 학생들의 차이를 인위적으로 없애고 대학에서 전형자료로 쓸 수 없게 하겠다면, 시험은 뭣하러 보는가? 아예 시험을 보지 않는 것이 학생들의 정서와 체력에 훨씬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닌가?

아마도 이러한 내용을 교육부의 관료들은 당연히 알고 있을 것이다. 잘 알면서도 말할 수 없는 상황에 있다면 그 고충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나라의 교육을 책임지고 있는 분들이라면 적어도 모 사립대학의 입시 문제 파동(본인의 후배 교수의 석궁 사건)과는 비교가 안되는 큰 문제라는 것을 모를까? 당연히 바른 말이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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