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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전에 번역했던 글을 옮긴다. 원래 나의 홈페이지에 있었는데 사정상 홈페이지가 변경되고 글을 옮겨두지 못했다. 후카야 교수의 허락을 받은 번역은 아니다. 이 것을 보고 후카야 교수의 글을 읽는 사람이 많이 생겼으면 한다.


이 책은 일본의 젊은 수학자(기하학자)인 후카야 켄지 교수가 쓴 책을 번역한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을 써 두는 것은 우선 내가 읽고 싶기 때문이다.  여러번에 걸쳐서 읽고 싶은 책이지만 일본말을 모르는 나로서는 원서를 두 번씩 사전을 찾아가며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렇게 번역한 것을 적어두기로 한다.  혹시 일본말을 모르는 사람들이 후카야 교수의 생각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수학자의 시점(視点)

후카야 켄지(Fukaya Kenji)


머리말


   이 책은 “수학세미나”에 1994년 4월에서 1999년 3월까지 연재된 수필 “수학자의 시점”을 책으로 펴낸 것으로, 수학에 관하여, 수학자에 관하여,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을 쓴 것이다.

   다시 한번 읽어보고, 표현이나 설명이 불충분한 점이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소의 보충을 후기로 적었을 뿐, 많은 수정은 하지 않았다.  심각한 문제를 화제로 삼고 있지만, 고지식하게 정면으로 부딪혀 논하느니 보다는, 가볍게 이야기한다라는 것이 “수학세미나” 연재 중의 스탠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수학과 수학자에 관한 잡담을 상대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읽어주기 바란다.  그 중에 현재의 수학과 수학자가 처해있는 상태를 다소나마 느낄 수 있다면 다행으로 생각한다.

   “수학세미나” 연재 중에 많은 도움을 주신 일본평론사의 橫山伸씨, 연재를 책으로 만들어주신 이와나미서점의 松永眞弓씨, 宮內久男씨에게 이 곳을 빌어 감사함을 전합니다.


1995년 12월

후카야 켄지



1.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하여


포앙카레는 고차원을 보았는가


   Computer Graphics가 유행한다고 한다.  Algorithm을 바탕으로하여 자동적으로 생성되는 도형은, 때로는 예술가가 만드는 것보다 신비적 매력이 있다.  그런데 그러한 도형과 같을 정도, 또는 한층 더 신비적인 도형을 수학자는 오랜 동안 연구해왔다.  (새삼스럽게 또라고 말씀하실지 모르지만) 고차원의 도형을 말하는 것이다.  우선, 과연 수학자는 고차원의 도형을 “보고” 있는지에 대하여 써보고 싶다.

   포앙카레의 “과학과 방법”의 가운데, 공간인식에 관하여 쓰여진 부분이 있다.  포앙카레의 결론은, 간단하게 말하면 삼차원 공간에 있어서 생활한 경험(결국 자기가 공간 내에서 운동한, 그것이 시각과 촉각이 결합된 경험)이 공간인식을 만드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이것과 칸트의 선험적 인식 운운과의 관계 등을 논한 철학자도 있는 것 같다.

   그러하지만 포앙카레가 이것을 쓴 당시, 틀림없이 고차원의 기하학의 중심이 될만한 수학, 즉, 위상기하학을 건설중이었다는 것을 철학자들이 알고 있었는지 어땠는지는 뚜렷하지 않다.

   포앙카레에 있어서, 예컨대 4차원의 공간이 과연 “보이”는가라는 것은 인식론의 문제라기보다, 고차원의 기하학을 어떻게 해서 건설할 것인가라는 실제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 결론이 이러한 것이었다고 하면 포앙카레로 하여금 결국 4차원은 “보이지 않았다”라고 해야할지 모른다.


도형적 직감


佐藤幹夫씨는 어떤 대담 가운데서 원(圓)의 인식에 언급하여, 원을 이해하려면 “ 이라는 방정식에 의하는 것이 결국 제일 좋다”라고 강조하고 계시다.  위대한 佐藤선생에게 거역하는 것은 분수를 대단히 넘는 일이지만 기하학자로서는, 원이 지니는 도형적 이미지의 면을 방정식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싶다.  머리 속에 그려진 둥근 이미지야말로 원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인간의 뇌 가운데 시각에 관한 부분은 대단히 많고, 시각을 통하여서의 인식은 인간이 물건을 생각하는 중심에 위치한다고 한다.  수학에 있어서도 도형적 직감은 사물을 인식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이다.  예를 들면, 논문에서는 긴 식으로 설명이 되어있어 이해가 곤란한 것을, 연구집회 같은 곳에서 저자가 그림을 하나 그린 찰나, 곧 알 수 있다는 것은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고차원의 도형을 연구할 때 사용하는 것도 역시 도형적 직감이다.  그렇다고 하면 100년 가까운 수학의 진보는 포앙카레에게 보이지 않았던 고차원의 도형을 보는 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답은 예스이기도 하고 노우이기도 하다.  만일 본다는 것을 보통 우리들이 (눈으로) 물건을 본다.  또는 본 일이 있는 어떤 물건을 생각해 묘사하는, 그런 의미라면, 포앙카레보다 잘 “보이는” 수학자들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현재 한창 연구되고 있는 고차원의 기하학은 도형적 직감 없이는 있을 수 없다.


Exotic한 구면


   예를 들면, exotic한 구면이라는 것을 아는가?  정확히는 7차원 구면과 위상동형이지만, 미분동형은 아닌 도형이다. (위상동형이라든가 미분동형이라는 것은 여기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무엇인가 구라는 보통 것 같으면서 그것과는 다른 것이 7차원에는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에 관하여 서술한 Milnor의 논문은 짧으므로, 위상기하학의 전문가라면 누구든지 Milnor가 행한 구성을 전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도형 전체를 눈으로 본 것 같이 생각하고 그려서, 그것이 7차원 구면과 위상동형이기는 하나 미분동형은 아닌 것을 시각적으로 납득하는 것은, 적어도 필자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러면 수학자는 어떻게 그것을 이해하고, 그래도 거기에 기하학적 직감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인가?

   우선, 좀 더 쉬운 예를 들어 말해보자.  평면 위에 두 줄의 직선이 있으면, 그것은 (평행하지 않은 한) 한 점에서 교차한다라고 하는 것은 물론 독자는 잘 알 것이다.  그러면 (3차원)공간의 두 직선이면 어떨까?  물론 이 책의 독자는 일반적으로 공간의 두 직선은 교차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타내는 그림을 머리로 생각하며 그릴 수도 있겠지만, 예를 들어 수학을 잘 못하는 중학생에게 이것을 질문하면, 정답률은 100%에서 어느 정도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라도 3차원 공간 안에 두 줄의 직선이 그어진 그림을 보여주면 이것을 이해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을 납득하면 다음부터는 그 그림을 자기 혹자서도 머리속에서 생각하여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4차원의 도형적 직감의 쉬운 한가지 예


   이것은 간혹 3차원의 문제로, 실제로 그림으로 그려진다.  그러면 4차원공간 가운데의 두 개의 (2차원)평면이면 어떨까?  이것을 처음 들으면 우선 망설일 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에게는 그림을 생각해내서 직접 답을 내는 일을 즉시는 못하기 쉬울 것이다.

   여기서 식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  즉 4차원 공간 중의 평면이란 4변수의 두 줄의 연립1차 방정식의 해이며, 이 것은 보통 단 하나 존재한다.  이렇게 해서 4차원공간 중의 두 개의 평면이 보통은 한 점에서 교차하는 것을 알며, 그러면 다음부터는 4차원에서 두 개의 평면이 한 점에서 교차하는 그림이 어쩐지 머리 속에 그려질 것 같아진다.



Exotic한 구면을 만든다


   이 것이 제 1단계이다.  이 것은 보여지고 있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문제에서는 이와 같이 “보여지고 있다”는 고찰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전체 상(像) 중의 그저 명색뿐인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처음에 쓴 exotic한 구면의 경우를 생각하자.  이것을 만드는 한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딘킨도형 을 생각한다.(그림) 이것이 무엇인지 설명은 안 해도 이것은 그래프니가 분명히 눈으로 볼 수 있다.  다음에 4차원 구면의 접bundle을 여덟 개의 딘킨도형에 따라 펴 합한다. (따라서 편다는 의미도 생략한다.)  4차원 구면의 접bundle이라 함은 8차원의 도형으로 4차원 구면에 두께를 더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것은 앞서 말한 4차원 중에서 두 개의 평면이 한 점에서 교차하는 것이 “보인다”라는 의미에서라면 보인다.  그것으로 생긴 도형도 뭔가 보인다는 것에 속한다.  Exotic한 구면은 이 도형의 경계이다.

   여기까지 오면 적어도 필자에게는 이것이 구면과 위상동형이라는 것은 “한눈에”는 알 수 없다.  더욱이 이것이 구면과 미분동형이 아니라는 것의 증명이라하면, 눈으로 본다는 것은 가능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물론 그 증명의 각각의 스텝은 도형적 직관에 따라 “보인다”.  그러나 그것들의 스텝은 이론으로 결부시켜져 있고, 전체는 그림으로 이해하였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본다는 것의 새로운 바람직한 자세


이 설명으로 이해되었는지 어떤지 자신은 없지만, 한가지 강조해 놓고 싶은 것은, 수학의 엄밀성과 추상성이 이 과정에서 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수학 이외의 세계에서 무엇을 논할 때, 우리들은 단지 삼단논법만을 따라서 옳은 것을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각 단계에서 주장되고 있는 일이 경험에 비추어서 납득하기 어려우면, 어떤 방법으로 논리를 납득하여도 그 결론은 거부할 것이다.  그러나 수학의 세계에서는 자주 그 각 단계에서의 정당성의 지침이 되는 경험이 결여되어있다.  시각적 직감으로 아는 것은 부분상(像)에 불과하다.  직감을 잃었을 때 사용되는 것은 논리밖에 없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엄밀한 증명을 통하여 많은 사실을 집적하였을 경우, 최후에 몇 개의 도형적 직감(어떤 것은 직접 시각적이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은)이 얻어진다.  그리하여 이해가 깊어져가는 것을 보여져간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고차원을 보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지난주 연구실을 청소하다, 고교생 때 읽던 책이 몆 권 나왔다.  상대성이론이라든가 우주론이라든가 하는 계몽서와 더불어, 사차원 공간이라든가 뭔가가 (다소 애교스럽게) 써있는 책도 있다.  당시 수학을 공부하면 차원이 높은 공간이 눈에 보일 것이라고 동경하고 있던 일이 생각난다.  그 기대는 저버렸다.  결국, 기하학의 전문가가 되어도 4차원의 도형을 눈으로 본 것 같이 생각해 그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그 대신, 본다는 것의 새로운 바람직한 자세는 알았다.  상상력과 논리의 결합에 따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는 것.  이것은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2. 피카소 미술관에서 생각한 일


피카소와 北齊


   근래에는 백화점의 일부에 전람회용 공간이 잘돼있다.  이러한 장소와 옛날부터의 미술관과의 한가지 차이는 전시의 종류로, 독립된 미술관이라면 여러 시대로부터 여러 가지 종류의 작품을 모아 놓았는데 대하여, 전람회라고 하면 특정한 사람의 작품만을 전시한다는 점이 많다는 것일 것이다.  이점에서 피카소 미술관 같은 것은, 오히려 백화점의 전람회에 가깝다.  현대의 작품을 필자와 같은 비전문가가 보는데는, 차라리 특정인의 그림이 여러 장 동시에 전시되어 있는 쪽이 도움이 된다.

   예를 들면, 다 빈치라던가, 반 아이크라던가, 北齊라던가라면, 한 장 보는 것만으로도 “훌륭하다”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예를 들어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 시대의 즉품을 한 장 (예비지식 없이) 보고, 이 것이 훌륭한 작품임을 알아내는데는, 보통 감수성이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을까?  적어도 필자에게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렇지만 열 장, 스무 장이라도 보고 있으면, 그것이 회화의 표현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된다.


과학자가 지녀야할 능력


   이와 같은 20세기의 예술과 19세기까지의 예술의 자세의 차이를, 현대에 가까워지면서, 문화적 생산물에서 자립시킨 작품 그 자체의 가치가 희박해져서, 그것이 생겨난 사회적 상황과 그에 주어진 영향과 같은 넓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의미”를 빼내고 나면 작품이 말하기 어려워진다고 요약하는 것도 가능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문화적 생산을 위하여 요구되는 능력도 다양화된다.  예를 들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지만) 실험실을 빌린 것만으로 노벨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있기도 하다.  해야할 실험을 적절히 판단하여, 그것이 실현될 수 있도록 예산을 획득하여, 또 그것을 훌륭히 해낼 수 있는 스태프를 모아‥‥‥라고 하는 것이 과학자가 지녀야할 능력으로서, 작지 않은 부분인 시대가 되었을 것이다.  동네에서 떨어진 연구실에서, 주위로부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으며, 터무니없는 연구를 완성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SF의 세계에서만 있고, 인간과 상대하기가 싫은 과학자는, 자금을 모으기 힘들기 때문에 결국 하나의 영화도 찍지 못하는 “천재 영화 감독”과 같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인가?


수학자의 세계


   수학과 관계가 없어 보이는 것을 길게 쓴 것은, 아마 수학자의 세계야말로, 사회적 상태와 관계없이 가치가 정해지는 문화적 생산물이 존재하며, 다만 수학을 잘하는 “것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만들어낸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마지막 자리일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가지 면으로는 또 확실히 그렇다고 보인다.  갈루아(Galois)나 아벨(Abel)의 이야기(1)는 이제는 옛 이야기로, 수학의 세계에서는 뛰어난 가치를 지닌 업적은, 가령 아무리 몹시 서투르게 설명되어있어도, 우선 그 가운데에서는 이해되고 평가되며, 우수한 업적을 올리는데 값비싼 실험 설비가 필요하지는 않다.  많은 연구자와의 교류는 확실히 힘이 되지만, 변변히 정보를 갖지 못한 세계의 한쪽 구석에 있는 무명의 수학자가 대리석을 발견하는 것도 아직까지는 가능하다.

   SF에 나오는 mad scientist를 그대로 하는 수학자도 아직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학생 상대의 강의든지 공동연구자 상대의 토론이라든지 같은 어조로 지껄인다.  화려한 퍼포먼스등과는 관계없이, 학회에서 발표할 때도, 자신이 하는 일을 잘 보이기 위하여 훌륭하게 선전문구를 생각하거나, 전문 밖에 있는 사람에게도 알기 쉽게 다소 부정확해도 예를 들어 이야기하거나 하는 것은 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엄밀하게 논문에 쓰는 그대로 정리를 서술하고, 논문과 같은 어조로 증명을 한다. (필자가 하고 있는 것 같은, 논문 이외의 잡문을 쓰고 있다든가 하는 “타락”은 결코 하지 않는다.)

   그러한 수학자들은, 어떤 사람들에게서는 상아탑 속에서밖에 살아나가지 못할 우물안 개구리 연구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수학의 진보를 지탱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연구자들이며, 그런 사람들이 살지 않는 세계가 되면, 수학의 세계의 매력은 반감되게 된다.  키튼의 영화는 단지 우당탕거려 우습기만 해서 채플린과 같은 깊이가 없다든지라고 말하는 동안은 영화팬으로서는 아직 수행이 부족하고, 진정한 영화팬은 키튼의 “예(藝)”야말로 영화라고 알고 있을 것이다.  정리와 증명을 일견 무미건조하게 되풀이하는 가운데 프로의 예(藝)가 있는 것을 이해하기 바란다.

   수학에서라면, 옳다고 증명해버리면 누구도 할 말이 없다.  선전이 훌륭하던 그렇지 않던, “사회적 상황”이 어찌되었던, 우수한 정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한, 예를 들면 채점방식의 피겨스케이팅에 비하여 100미터 달리기가 가지고 있는, 깨끗함을 기분 좋게 생각하며 수학자가 된 사람은 (필자를 포함하여) 적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수학의 세계도 그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현대수학의 리-더들


지난번의 국제수학자회의京都(1990년)에서 위튼(Witten)이 Fields상을 수상했을 때, 江口徹씨는 일본수학회지에 실린 소개글에서, 위튼을 통하여 물리학자가 현대수학의 수법을 교육적 효과를 언급했다.  수학 쪽에서 보면, 위튼에 의해 수학자가 현대의 소립자론의 수법을 받아들이게된 것은 위튼의 중요한 업적이라고 간주될 것이다.

   또,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수학자 아티야(Atiyah)의 1980년 이후의 업적을 볼 때, 아티야 자신이 새롭게 증명한 정리도 그러한 것처럼, 그것보다도 오히려 중요한 것은, 아티야가 여러 가지 수단을 통하여 수학의 진보 방향을 리드한 그 영향력이었다.

   다른 분야에서는 그것은 당연할지 모르지만, 수학의 세계에서 무엇인가 정리를 증명했다던가 정의를 했다던가 밖의 일이 업적으로 취급받는 일은 오히려 드문 일이다.  그러한, 예컨대 교육적 효과 같은 것은, 지금은 오히려 일류수학자들의 여기(余技)로 간주되고있었던 것같이 생각된다. (결국 그것이 되면 그것도 훌륭하지만, 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대단한 일은 아닌 정도의 평가였다고 생각된다.  물론 힐버트(Hilbert)의 “수학의 문제”의 제출 등, 예외도 있지만)  그리하여 만일에 영향력이 수학자의 능력의 주요 부분이 된다면, 우물안 개구리로 여유롭게 수학을 하고 있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티야도 위튼도 강연의 명수이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그만큼의 영향력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수학의 세계의 매력


   그렇다 하면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최후의 파라다이스도 붕괴 직전일까?  필자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정리를 그냥 증명하는 것 밖의 부분도 중요하고, 그러한 것도 정확히 평가받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은 안다.  예를 들면, 전문가 외의 사람들에 맞게 개설(槪說)을 쓴다던가, 혹은 수학자 이외의 사람에게 수학을 설명한다던가가 수학의 세계에서는 2류의 일로 간주되어온 것은 확실하고, 그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최후에는 엄밀히 증명된 정리와 그것이 지니는 객관적 가치로 승부하는 것이 수학세계의 매력의 많은 부분을 형성해왔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후의 보루


   20세기의 많은 예술은 예술운동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것은 한가지로는 작품 개개의 자립된 가치가 희박해져서, 새로운 표현양식의 제시라는 “사회적” 또는 “정치적”인 일이 창조의 전면에 나타난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 일이 과연 20세기의 예술에 바람직한 일이었나를 논할 자격은 필자에게는 없지만, 다른 가능성이 있었는가 어떤가를 빼고 말하자면, 결국, 결과는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한 쪽에서는 거대과학이 발전하여, 연구한다는 일이, 독립된 가치관을 가진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창조로부터, 조직 가운데서 톱니바퀴의 하나로서의 역할을 완수하는 것으로 바뀌어, 영향력을 지니려면 정치적 능력을 필요로하게 된다는 일이 일어난다고도 듣는다.

   그렇다고 하면, 순수수학을 자유로운 개인에 의한 창조의 최후의 보루로서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IHES(고등과학연구소) 체재중에 찾아간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에서‥‥‥.


(1) 둘 다 너무 시대를 앞서간 까닭에 이해되지 못하고, 젊어서 세상을 등진 것으로 유명한, 19세기의 수학자. 타카기 테-지(高木貞治) “근대수학사담”(이와나미 문고)등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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